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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와 관련된 뼈아픈 추억 《날씨의 맛》 본문

책세상 이야기/편집자 분투기

날씨와 관련된 뼈아픈 추억 《날씨의 맛》

책세상 2016.05.17 11:11

날씨의 맛

알랭 코르뱅 외 지음 | 길혜연 옮김 | 16,800원


비, 햇빛, 바람, 눈, 안개, 뇌우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의 발자취를 탐색했다.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날씨 관련 묘사를 분석하고, 예술사와 사회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안개, 바람 등을 느끼는 감각의 변화를 짚어내는 이 책은 그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우리 감수성의 흥미진진한 역사를 발견케 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은 날씨를 어떻게 지각해왔을까? 비와 눈을 맞으며, 안개와 뇌우를 목도하며 개개인은 어떤 감정을 느껴왔을까? 날씨를 느끼는 감각과 감수성의 역사를 다룬 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날씨와 관련된 각별한 추억을 갖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검토서를 읽으며 십여 년 전 프랑스에서 어학연수차 1년간 머물렀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남부의 몽펠리에라는 도시에 있었는데, 겨울에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뼛속까지 파고드는 습한 추위에 생소함을 느꼈고, 봄에는 ‘미스트랄’이라는 이름의 바람이 얼마나 강력한지 맛보았다(‘미스트랄’을 비롯한 프랑스 지역풍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 책의 3장 ‘이야기 따라 바람 따라’에 나온다).


여름에는 불볕더위가 극심하여 통풍이 되지 않는 기숙사 방에서 선풍기도 없이 잠 못 드는 밤들을 보냈다. 어느 날 밤에는 부채질을 아무리 해도 더위가 가시지 않아 냉장고를 열어놓고 그 앞에서 잠들기도 했다. 그 일로 냉장고가 고장 나서 시원한 물도 못 마시고 며칠간 더 고생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은 기숙사에 살던 중국인 친구도 냉장고를 열어놓고 잔 적이 있다는 게 아닌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닥친 더위의 무시무시함에 함께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 프란츠 폰 렌바흐, <어린 목동>


이처럼 2003년 여름의 더위는 유례가 없어서 이 책의 2장 ‘햇빛, 또는 평온한 날씨의 맛’에 이 같은 언급이 나올 정도다.


“2003년의 살인적인 폭염은 일기예보에 매우 새로운 주의보를 등장시키며 날씨 평가에서 과도한 햇빛에 대한 집단적인 불안을 불러일으켰다.”(89쪽)


당시 1만 5,000명에 이르는 사람이 폭염으로 사망했는데, 그중 대다수는 독거노인이었다. 바캉스 시즌이라 의사 인력이 부족한 탓에 피해가 커져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시신을 안치하고 묻을 공간도 부족해져서 임시 안치소를 마련하고 묘혈을 파는 모습이 담긴 우울한 뉴스 장면이 연일 전파를 탔다. 급기야 시라크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 연설에서, 핵가족화되고 파편화된 프랑스 사회의 문제가 폭염으로 인해 만천하에 드러났다며 사회적인 ‘연대’를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하필 내가 있을 때 폭염이라니 하고 하늘을 원망했는데, 한국으로 떠나는 날까지 날씨는 나를 들었다 놨다 했다. 그날 드물게도 겨울 폭우가 내린 것이다. 비행기를 놓치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해하면서 소형차들이 둥둥 떠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가까스로 공항에 도착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홍수가 심각해서 휴교를 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 귀스타브 카유보트, <비 오는 날, 파리의 거리>


이렇듯 날씨와 관련하여 강렬한 기억을 간직한 나는 각종 기상 이변에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는지, 기후와 기상 변화에 따른 대지와 공기의 느낌이 사람들의 감수성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것이 문학과 회화 작품에는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날씨와 기후에 따라 사람들의 기질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볼 수 있는 이 책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작업해나가면서 전부터 궁금해했던 사항들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어서 의문이 해소되는 재미를 느꼈다. 17, 18세기가 배경인 유럽 시대물이나 관련 기록을 보면, 사람들이 햇빛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며 특히 귀족 부인들이 양산을 반드시 쓰고 다녔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 유럽에서는 선글라스를 착용할 뿐 (일본인, 한국인 관광객을 제외하고) 양산을 쓰고 다니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햇빛에 그을리는 것을 건강의 증표라고 생각하고 굉장히 선호하는 편인데, 이처럼 햇빛에 대한 인식이 어떤 이유로 달라졌는지를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어 흥미로웠다. 18세기까지만 해도 햇볕을 지나치게 쬐면 몸에 해롭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무더위와 가뭄으로 인한 재난은 태양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을 더욱 부채질했으나 19세기에 이르러 병을 치유하기 위해 햇볕을 쬐는 것이 권고되었다는 것이다. 햇빛의 살균 효과 같은 긍정적인 측면이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정화력과 치유력을 지닌 햇빛은 아이의 건강한 성장에도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져 일광욕과 산책 열풍을 대대적으로 일으켰다고 한다.


| 햇빛이 가득한 니스에서 겨울을 보낼 것을 권유하는 벨 에포크 시대의 광고 포스터


비, 햇빛, 바람, 눈, 안개, 뇌우, 그리고 기상 자체와 일기예보를 다룬 일곱 개의 장을 각각의 기상 현상에 일가견이 있는 전문가들이 집필한 만큼 풍부한 전문 지식을 담은 이 책은 날씨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관점과 다채로운 개성이 두드러진다. ‘바람’을 다룬 3장은 프랑스 각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를 중심으로 바람이 묘사되는 다양한 양상을 분석했고, ‘안개’를 다룬 5장과 ‘일기예보’를 다룬 7장은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행한 인터뷰를 활용했다. ‘눈’과 ‘뇌우’를 다룬 4장과 6장에서는 눈이 내리거나 쌓인 풍경, 뇌우가 내리치는 광경이 등장하는 미술 작품을 다수 소개하여 날씨를 표현하는 기법이 어떻게 변화했고 이에 영향을 미친 요소는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브뤼헐, 카유보트, 터너, 모네 등 유명 화가의 그림, 안개가 끼거나 번개가 치고 눈이 쌓인 프랑스 각 지역을 기록한 사진, 해수욕장 개장을 알리거나 햇빛을 막는 의복을 선전한 백화점의 광고 포스터, 기상 관련 사항을 표시한 지도 등등, 시각 자료도 다채롭게 담고 있다. 편집 과정에서는 날씨와 관련된 그림과 사진 작품, 지도 등 원서에는 없는 자료들을 다수 보충해 넣기도 했다.


이 책은 프랑스 연구자들의 저서인 만큼 프랑스와 유럽 지역의 역사를 중심으로 논지를 전개하고 프랑스의 지역적 특색에 치중하여 한국 독자에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만큼 한국인이 날씨를 느끼는 감수성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고찰하는 한국판 《날씨의 맛》을 언젠가는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 대 브뤼헐, <눈 속의 사냥꾼들>(1565)


이 책을 진행하면서도 날씨와 관련된 잊지 못할 기억이 하나 더 생겼다. 제주도 여행을 떠나려고 한 날, 폭설로 비행기가 결항이 되고 만 것이다. 아쉬움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난생처음 제주도에 가보려 했는데 왜 하필 32년 만의 폭설이 내리는 것인지 원망하며 운이 없음을 한탄했다. 과학의 발전으로 날씨를 얼마간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지만, 날씨는 하늘의 소관이고 신의 뜻이라는 옛사람들의 생각은 여전히 유효한 것만 같았다.


이단네 책세상 편집2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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