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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현명하게 나이 들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하여》 본문

책세상 이야기/편집자 분투기

어떻게 해야 현명하게 나이 들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하여》

책세상 2016.07.15 17:05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하여 ─ 몽테뉴 《수상록》 선집

미셸 에켐 드 몽테뉴 지음 | 고봉만 엮고 옮김 | 책세상 | 14,000w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하여》는 총 3권 107장으로 구성된 《수상록》에서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담긴 글들을 발췌하여 묶은 책이다. 16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모럴리스트로, ‘어떻게 혼란스러운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한 몽테뉴. 그는 종교 전쟁과 페스트로 참화가 계속된 시대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살았던 만큼 죽음이란 주제에 깊이 파고들었다. 노년과 죽음에 대한 그의 담담한 사색과 통찰, 진솔한 자기 고백은 40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각종 사고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생존자들의 후유증 극복기를 다룬 《트라우마여, 안녕》을 작업하고 나서 착수한 책이 바로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하여》이다. ‘생존’에 이어 ‘노화’와 ‘죽음’이라니.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여러모로 고민해보고 성찰해볼 기회이다 싶었다. 마침 최근 몇 년간 부고를 접하고 조문하는 일이 부쩍 잦아진데다 1년이 넘도록 입원하고 계신 외할머니를 뵈러 요양병원을 드나들면서 이 두 주제를 피부 가까이 느끼는 중이었다.


병원에서 환자가 임종하는 순간을 목도할 때마다, 오랜 세월 혼수상태로 와병 중인 환자를 지켜볼 때마다 과연 행복하게 나이 들고 죽는 것이란 무엇일까 씁쓸하게 자문해보곤 했다. 그리고 질병의 고통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지도. 2년 전에 책세상에서 출간된 《인생의 맛》을 통해 몽테뉴가 어떤 사람이고 그의 《수상록》이 어떤 작품인지 살짝 맛을 봤었다면 이번에는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볼 기회이기도 했다.



지금의 내 나이와 별 차이도 나지 않은 만 서른일곱의 나이에 은퇴하여 서재에 은둔하며 《수상록》을 집필하기 시작한 몽테뉴. 그는 죽을 때까지 20여 년간 《수상록》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자유롭게 실험했고, 특히 노화와 죽음이란 주제에 줄곧 천착했다. 종교전쟁과 페스트로 인해 서른다섯을 넘겨 산 사람보다 그 전에 죽은 사람이 더 많은 시대여서 그랬을까? 평균 수명이 짧았던 만큼 몽테뉴를 비롯한 그때 사람들은 일찍이 세상 다 산 애늙은이처럼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게다가 몽테뉴는 인생의 친구 에티엔 드 라보에티(1530∼1563)를 페스트로 잃은데다 아버지와 남동생의 죽음을 연이어 경험했다. 여섯 명의 딸을 얻었으나 그중 한 명만 제외하고 모두 일찍 잃고 마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기습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늘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몽테뉴의 초상화



몽테뉴는 이 책에서 노화라는 현상을 고찰하고 현명하게 나이 드는 법을 이야기하며 자식과의 관계, 무위와 고독의 기쁨, 독서와 글쓰기의 즐거움 등을 논한다. 몽테뉴는 400년도 더 전에 살았던 프랑스 귀족 출신의 전직 법관으로, 나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고 그저 멀게만 느껴지는 인물이었으나 그의 사유는 시공을 초월해 깊은 공감을 자아냈다. 나이가 든다고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회의적인 태도, 자기만의 뒷방을 마련해두고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라는 권고, 책과 벗하며 즐거움과 위안을 구한다는 애정 어린 고백… 어떻게 해야 현명하고 아름답게 나이 들 수 있는지, 마음에 새겨둘 만한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한편, 몽테뉴는 죽음의 문제에 진지하게 다가가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맞이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후회가 없는지 성찰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가 세월에 따라 변화했다는 점이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키케로의 “철학이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배우는 것이다”라는 주장에 동의한 그는 죽음을 자나 깨나 생각하고 죽음에 대비하라고 말한다.


| 몽테뉴의 서재


그러나 농민들이 죽음을 대하는 무심하고도 달관한 태도를 목도하고, 그 자신이 낙마 사고로 하마터면 죽을 뻔한 일을 겪은 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서 몽테뉴의 생각은 일변한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예상 외로 고통스럽지 않고 감미롭기까지 한데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니 죽음을 공연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몽테뉴는 《수상록》의 마지막 장인 3권 13장 〈경험에 대하여〉에서 자연에 순응하며 삶의 기쁨을 만끽하자고, 죽음에 구애받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고 독자들에게 권유하기에 이른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20대 때부터 삶의 주요 고비마다 《수상록》을 꺼내 읽으며 지혜와 위안을 구해온 편역자 고봉만 선생님의 오랜 애정에서 비롯했다. 그간 각별히 마음에 남은 구절들 중에서도 50대에 들어서 더욱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노년과 죽음에 관한 것들을 발췌하고 엮어 한 권의 책으로 펴내게 된 것이다.


| 시몽 르나르 드 생탕드레, <바니타스>(1650년경).


노화와 죽음을 주요 테마로 한 이 책의 각 장에는 인생의 덧없음과 유한함, 세속적 욕망 추구의 허망함을 보여주는 ‘바니타스화’를 비롯해 내용과 어울리는 그림들을 찾아서 넣었다. 그 과정에서 결국에는 시들고 마는 식물, 해골, 멈춘 시계 등의 이미지를 통해 ‘모두가 언젠가는 반드시 죽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서늘하게 상기시키는 바니타스화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천 페이지가 훌쩍 넘는 방대한 분량에다 술술 읽어나가기에 만만치 않은 내용을 담아 그간 선뜻 손에 잡지 못했던 《수상록》. 이번 작업을 계기로 몽테뉴의 다채로운 사유를 본격적으로 탐험하고픈 마음이 생겼다.


이단네 책세상 편집2팀




1 Comments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soulco.tistory.com BlogIcon 지성의 전당 2018.08.07 19:01 신고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죽음에 대해 관심 있어 하시는 것 같아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 드리려고 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한번 검토 부탁드립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아래는 책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www.uec2018.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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