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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 이야기/시로 여는 세상

마지막 봄눈 나리던 날 첫눈과 사랑을 읊다

책세상 2012.03.27 17:53

고요한 하강, 사무친 마음 ― 눈의 입 모양을 생각하며


모네, <아르장퇴유의 눈 풍경>


사랑

                                       조태일

첫눈이 내린다.
어디고 없이 제멋대로
내리고 내리는 것 같지만
내릴 곳을 보아 가며
서둘지 않고 내린다.

첫눈이 내린다.
지상의 왼갖 성명聲明들을 잠재우며
지상의 왼갖 낙서들을 지우며
한량없이
하이얗게 내린다.

높고높은 하늘을 지나서
가파른 절벽을 지나서
풀잎들의 머리 위를 지나서

움직이는 것들 위에 내린다
숨 쉬는 것들 위에서 내린다
꿈꾸는 것들 위에서 내린다.

오오, 오오, 소리치지는 않고
오오, 오오, 그 입 모양만 보이며
우리들 귓바퀴 근처에 내린다.

보아라, 보아라, 소리치지는 않고
보아라, 보아라, 그 입 모양만 보이며
우리들 눈앞에
뺨 비비며
첫눈은 그렇게 그렇게
붐빈다.


ㅡ조태일, <사랑>, 《자유가 시인더러》(창비시선)


* * *


3월 말의 토요일 오후, 느닷없는 소식처럼 눈발이 날리고
동료의 결혼식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괜히 설레었다.

봄날 꿈처럼 잠시 스친 눈은 소리가 거의 없었다.
한겨울 세찬 눈발로 날릴 때조차 눈은, 고요하다. 

그렇지만 그 고요한 하강 속에 사무친 마음이 있을 것이다.
격렬한 정념과 그로 인해 터져 나오는 외침이
“하늘과 절벽과 풀잎들의 머리 위”를 지나는 동안
침묵이 되거나 미음微音음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음 소거의 시간이 있었기에
시인에게
“숨 쉬는 것들” “꿈꾸는 것들” 위에 내리는 사랑이 되었을 것이다.

이 시를 본 뒤로
눈을 보면 ‘오’ 하고 벌린 입 모양이 떠오른다.

“오오, 오오, 소리치지는 않고
오오, 오오, 그 입 모양만 보이”는 눈이 눈물겹고,
그 입 모양을 알아채고 “첫눈이 붐빈다”라고 말하는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시인의 마음도 눈물겹다.

눈물겹지만, 나약하지 않고
굳세고 품위가 있는 아름다움이다.

조태일(1941~1999)은 “정치적 암흑기에 단호한 비판의 목소리를 드높인
〈국토〉 연작의 시인”이기도 하다.


_편집장 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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