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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시인 마야코프스키가 남긴 것 "릴리, 나를 사랑해주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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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시인 마야코프스키가 남긴 것 "릴리, 나를 사랑해주오"

책세상 2012.04.17 10:52
활자유랑자 금정연

1.
“나는 시를 단념한 인간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우리들의 광기를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달라>를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시의 말과 소설의 말의 근본적인 차이를 어떻게든 명확히 인식함으로써 시 쓰기를 그만두고 소설로 향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그는 시를 단념했지만, 결코 말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을 끊을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결국 시를 외면할 수 없는 인간이다. 소설가다. 그는 이렇게 쓴다.

다양한 시대, 여러 지방의 전투에서 비참하게 쓰러져 간 병사의 배낭에서 종종 시집이 발견된다는 보고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 명료한 의식을 갖춘 채, 눈앞에 있는 자신의 육체=영혼의 죽음을 응시할 때, 자신이 하나 혹은 몇 편의 시를 내면에 안고서 쓰러질 게 틀림없다고 똑똑히 확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그러나 소설이란 다 읽고 나면 참호에 내버려지는 것이다. 다 읽고 난 소설을 참호에 버린 채 일어나서 떠나간 병사들이 총알을 맞고 쓰러질 때, 그는 그 육체=영혼으로부터 떼어 내기 힘든 시와 함께 죽었던 것이다. 나는 병사는 아니지만 이 뜻하지 않은 죽음의 함정으로 가득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러한 돌연한 죽음 앞에서 내 육체=영혼의 내부에서 나와 함께 죽어 갈 수 있는 시를 확보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통을 얼마간 완화시키고자 시를 구하고 있을 뿐, 그러한 시 외에는 어떠한 화려한 말의 수식도 찾아내고 싶지 않다.
오에 겐자부로, 우리들의 광기를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달라》, 12쪽

그렇다면, 나는 생각한다, 뜻하지 않은 죽음의 함정으로 가득한 시대를 저마다의 시를 통해 살아낸 시인의 경우는 어떨까. 명료한 의식을 갖춘 채, 눈앞에 있는 자신의 육체=영혼의 죽음을 응시할 때, 그 자신의 내면에 안고 쓰러지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말해, 시인은 무엇과 함께 죽는가? 시인가 감정의 조각인가 몇 개의 단어인가 혹은 그가 평생을 통해 붙잡으려 했던 어떤 이미지인가. 그러니까 4월의 어느 아침, 36년을 함께한 자신의 육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겨야만 했던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의 경우.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1893~1930)

2.
마야코프스키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몇 가지 키워드 : 미래파, 선동가, 혁명의 계관시인. 그것은 모두 진실이다. 마야코프스키는 미래파이고 선동가이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혁명을 꿈꾸고 또 노래하던 혁명의 계관시인이다. 물론, 그것이 마야코프스키의 전부는 아니다.

말하자면 그는 준비된 혁명가였다. 어린 시절, 모스크바에서 공부하던 누이가 가져다준 혁명시를 읽으며 당시 러시아 사회를 휩쓸고 있던 혁명에 관심을 갖게 된 마야코프스키.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학생 데모에 참가하며 고리키와 마르크스를 탐독하던 그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사회주의. 연설. 신문. ……나는 아침 여섯 시면 일어나곤 했다. 술 취한 사람처럼 읽었다. ……내 생활 전체는 엉킨 것을 풀고 세계를 조직화할 수 있는 사회주의자들의 능력에 감명을 받은 것이다. 마르크스 연구 모임에 갔다. 에르푸르트 강령에 깊이 심취했다. 룸펜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서도. 스스로 사회 민주당원으로 자처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총들을 몰래 빼내서 사회 민주당에 가져다주었다. ……리옹에 자주 갔다. 입에 자갈을 가득 물고 연설을 연습하곤 했다.
앤 차터스, 마야코프스키 : 사랑과 죽음의 시인》, 22쪽

그런 그에게 시련이 닥친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빈털터리가 된 가족들은 모스크바로 이주하고, 어린 마야코프스키는 점점 더 혁명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자신의 배경을 이루고 있던 그루지야로부터 넓고 더러운 도시 속의 초라한 곳으로 나온 그는” 가난한 두 손으로 무엇이든 붙잡아야 했다. 그리고 혁명은 그곳에 있었다.

열네 살의 나이에 볼셰비키에 가담한 마야코프스키는 이후 선전선동 혐의로 세 번의 체포를 당한다. 2주와 한 달 그리고 6개월 동안의 수감 생활. 특히 세 번째에는 경찰을 조롱하고 당국에 반항했다는 이유로 꼼짝없이 독방 신세를 져야만 했다. 고작해야 열다섯 살의 소년이다. 부티르키의 독방에서 마야코프스키는 정치활동에 깊은 회의를 느낀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던 그곳에서, 소년은 고전을 읽으며 일생 동안 자신을 사로잡을 예술에 대한 열망을 키운다.

1910년 1월, 마침내 출소한 마야코프스키는 당을 떠나 ‘모스크바 회화‧조각‧건축 학교’에 입학한다. 직업 화가가 되겠다는 포부를 안고. 그곳에서 그는 다비드 부를류크를 만난다. 훗날 자서전을 통해 “진정한 나의 스승”이라고 부르게 될 남자를. 마야코프스키의 운명을 바꾼 만남이었다.

열 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부유한 집안 덕에 독일과 프랑스에서 예술을 공부하고 돌아와 아방가르드 화가로 이름을 날리던 부를류크는 마야코프스키의 천재적 재능을 알아본 첫 번째 사람이었다. 어느 날, 어두운 모스크바 거리를 걷던 마야코프스키는 부를류크에게 자신이 쓴 시의 몇 구절을 들려준다. 친구가 쓴 시라는 소심한 거짓말과 함께. 하지만 그 자리에 멈춰 선 부를류크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소리친다. “아냐, 바로 네가, 네가 쓴 거야! 이제 보니 훌륭한 시인이로구나!”

부를류크는 마야코프스키에게 계속해서 시를 쓰도록 부추기는 한편, 자신이 몸담고 있던 모임으로 그를 안내한다. 부를류크는 자신의 동지들에게 마야코프스키를 젊은 천재 시인이라고 소개한다. 순식간에 그룹의 핵심 멤버가 된 마야코프스키. 그것은 혁신과 전위를 추구하는 예술가들의 모임, 스스로를 ‘미래인’이라고 불렀지만 이내 비평가들에 의해 ‘미래파’라고 불리게 될 모임이었다.

3.
미래파의 입장은 요란했고, 과장되었으며 그만큼의 패기로 가득했다. 1912년 12월 발표한 시집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에 실린 같은 제목의 선언문을 보자. 수많은 선배 예술가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이전의 모든 문화를 철저하게 조롱하고 또 부정하는 그들은 이렇게 선언한다. 아니, 명령한다.

오직 우리만이 이 시대의 얼굴이다. 시간의 뿔피리는 우리를 통해 언어 예술 속에서 울려 퍼진다.
과거는 갑갑하다. 아카데미와 푸슈킨은 상형 문자보다 더 이해하기 힘들다. 푸슈킨,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을 현대라는 기선에서 던져버려라.
(…)
우리는 마천루의 높이에 올라 보잘것없는 그들을 내려다본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시인의 권리를 존중해줄 것을 명령한다.
1. 독단적이고 자유로운 파생어로 시인 자신의 어휘 범위를 확장시킬 권리(새로운 말).
2. 그들 시대 이전까지 존재해온 언어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증오의 권리.
3. 당신들이 목욕탕 회초리로 만든 보잘것없는 명예의 화관을 자신의 오만한 이마에서 혐오스럽게 떼어내 버릴 권리.
4. 비난과 분노의 바다 한가운데서 “우리”라는 말의 바위덩어리 위에 서 있을 권리.
그리고 만일 당분간 우리의 문장 속에 당신들의 “상식”과 “좋은 취향”의 더러운 흔적이 남아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은 이미 자기 충족적인(자족적인) 말의 새롭고 아름다운 미래의 여름 번갯불과 함께 가장 먼저 명멸할 것이다.
마야코프스키,《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 246쪽

“얼굴에는 색칠을 하고 단추 구멍에는 나무숟가락을 꽂은 괴상한 복장으로 거리를 뽐내며 활보”하고, “그랜드 피아노를 거꾸로 달아놓고 시를 낭송”하는 등 과격한 행색과 기이한 행동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데 성공한 미래파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러시아 문화계에서 자신들의 지분을 넓혀가기 시작한다. 마야코프스키 또한 어느 누구보다도 더 미래파적인 모습으로, 무심함과 오만함이 뒤섞인 열정으로, 시와 희곡을 발표하며 촉망받는 천재 시인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는다.

<마야코프스키, 사랑과 죽음의 시인>의 저자인 앤 차터스와 새뮤얼 차터스는 당시의 마야코프스키를 이렇게 평가한다.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 어떤 비극>(첫 번째 희곡)을 썼을 무렵, 마야코프스키의 성격에는 두 가지 면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세상이 알고 있는 마야코프스키를 화려하고 오만한 멋쟁이로 과장시켰다. 그것은 소심하고 연약하기만 한 자기 내면의 이중 감정이 스스로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어떤 때는 그 감정이 자기를 압도해버릴 것만같이 느껴졌다. 어려서부터 그는 외롭다고 느꼈다.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꼈다. 그리고 열여섯이라는 나이에 형무소에서 보낸 다섯 달 동안의 상처받은 경험은 그를 정서적으로 불균형한 사람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는 자주 자살을 생각했다. 미래파로서의 촌뜨기 같은 태도라던지, 많은 사랑을 편력하며 보여준 냉담함이라던지, 상처받기 쉬운 자기의 정서를 애써 부인하려고 했던 점들만 보더라도 그가 불안정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앤 차터스, 마야코프스키, 사랑과 죽음의 시인, 34쪽

많은 위대한 시인들이 그러했듯 마야코프스키 또한 그 자신의 인생의 배우가 되어 이상적이라고 상상한 삶을 연기했다. 그는 과장된 제스처로 자신의 재능을 과시했고, 탐욕스러운 연인이 되어 여인들의 마음을 뻔뻔히 요구했다. 하지만 그가 믿고 싶었던 자신과 실제의 그 자신 사이에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했고, 그가 ‘화려하고 오만한 멋쟁이’로서의 자신을 연기하면 연기할수록 그것은 더욱 깊어만 갔다. 차터스 부부가 말한 외로움과 상처받기 쉬운 예민함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자신만만했고 거침이 없었지만, 그의 내면에는 이미 어찌할 도리 없는 절망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아버지 막심 고리키는 마야코프스키의 내면에서 들끓는 혼란을 보았다. 그의 앞에 놓인 미래 또한. 그것은 찬란하게 빛나지만 그만큼 깊은 어둠을 가진 어떤 것이었다. 1915년의 어느 여름, 마야코프스키를 아침식사에 초대한 고리키는 식탁에 앉아 밥을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발작적으로 시를 외우던, 몸을 제멋대로 흔들며 점점 다급해지는 목소리로 시를 내뱉다 이내 격정에 휩싸여 낭송을 채 마치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 젊은 시인의 모습을 이렇게 회상한다.

“자네에겐 위대하지만 아마도 어려운 미래가 있을 걸세. 그리고 자네의 재능은 많은 노력을 요구할 걸세”라고 그에게 내 의견을 얘기하자 마야코프스키는 음울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전 오늘 미래가 필요합니다. 기쁨이 없으면 미래도 필요하지 않지요. 그런데 전 기쁨을 모릅니다.” 행동이 매우 신경질적인 것이 뭔가 깊이 혼란을 겪고 있는 게 역력했다. 그는 두 개의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 같았다. 하나는 순수한 서정시인의 목소리였고, 다른 하나는 날카로운 풍자의 목소리였다. 그가 유난히 예민하고,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매우 불행하다는 것도.
이하 같은 책, 46쪽

<닥터 지바고>를 쓴 소설가이자 시인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또한 그것을 알았다.

모스크바 시절 파스테르나크는 시인이 되겠다는 그의 강철 같은 의지에 매혹되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체하기를 잘 한다던가, 한참을 뚱해가지고 난폭한 행동만 일삼는다던가, 요란한 과시욕에 빠진다던가 하는 등의 그의 태도 이면에는 깊은 우울이 자리하고 있음을 파스테르나크 역시 감지할 수 있었다. 얼토당토않은 수줍음과 억지로 꾸민 그의 자유 뒤에는 정작 자유가 필요하다는 우려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62쪽

그들이 본 그대로, 비록 마야코프스키 자신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대단한 재능은 그를 위대하고도 험난한 미래로 이끌었다. 숨길 수 없는 흉터처럼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던 서정시인의 목소리와 그를 위대한 혁명 시인으로 만들었던 “요란한 과장과 모욕과 허식이 한데 어우러진” 풍자의 목소리는, 그 사이의 간극은, 그의 예민한 마음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아무리 가장을 하고 또 과장해도 소용없었다. 그리하여 불행은, 그날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그 후로도 결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4.
마야코프스키의 운명을 바꾼 두 번째 만남은 오십 브릭과 릴리 브릭 부부와의 만남이었다. 마야코프스키는 원래 릴리의 동생인 엘자에게 구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릴리는 동생을 따라다니는 자칭 시인을, 그러나 그녀가 보기에는 영락없는 건달을 좋아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몇 번의 만남 끝에, 그러니까 마야코프스키가 달갑지 않아하는 그들 부부의 귀에 자신의 시를 끈질기게 쑤셔 넣은 끝에, 그들은 시인에 대한 자신들의 인상을 바꿀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바뀐 것은 인상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었다.

마야코프스키가 읽어주는 ‘바지 입은 구름’을 듣고 있던 우리들은, 그때, 바로 그 날 저녁, 운명이 결정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언니와 형부가 그의 시에 보여준 반응은 열광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그의 시를 맹목적으로 사랑해버렸다. 그리고 마야코프스키는 언니 릴리를 맹목적으로 사랑하게 됐고.
48쪽

엘자의 증언대로, 오십과 릴리 부부는 그의 시를 맹목적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오십은 자신이 직접 그의 시를 출판하겠다고 나서는 것으로 모자라 앞으로 마야코프스키의 시 한 줄당 50코페이카를 지불한다는 내용의 ‘영구적인 계약’까지 맺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마야코프스키는 오십이 떨리는 손으로 읽고 있던 자신의 노트를 빼앗아 릴리 앞에 펼친 후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이 시를 부인에게 바쳐도 되겠습니까?”

오십 브릭과 릴리 브릭, 마야코프스키

릴리 역시 마야코프스키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내 연인이 되었고, 오십 또한 그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육체관계에 별 관심이 없는데다가 기존의 가족구성을 벗어난 새로운 관계를 꿈꾸던 이상주의자 오십은 그들의 관계에 개의치 않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릴리에게 “당신을 충분히 이해하겠소. 마야코프스키 같은 사람을 어떻게 거절한단 말이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헤어져서는 안 되오”라고 말한 오십은 마야코프스키에게는 ‘평생 친구’로 지내자고 말한다. 그것은 진심이었고, 그들은 그렇게 했다. 무려 15년 동안이나 다소 기묘한, 그러나 그들에게는 더없이 자연스러웠던 삼각관계를 유지한 것이다.

마야코프스키가 세상을 떠나는 바로 그 순간까지.

5.
하지만 마야코프스키는 오십과 달리 그녀를 소유하고 싶었다. 릴리의 모든 것을, 하나부터 끝까지. 그러나 릴리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모스크바 미래파의 일원이자 마야코프스키의 친구였던 빅토르 슈클로프스키의 표현대로, 릴리는 “슬퍼할 줄도 알고, 여자다울 줄도 알고, 변덕스러울 줄도 알고, 천박할 줄도 알고, 자존심을 부릴 줄도, 사랑을 할 줄도, 영리할 줄도 아는 여자였다. 뭐든 마음 내키는 대로 말이다.”(슈클로프스키는 여기에 다소 냉소적인 어조로 “그래서 셰익스피어가 코미디에 여자를 그려 넣었던 모양이다"라고 덧붙인다.)

마야코프스키의 호텔방에서 함께 사랑을 나눈 후면 그녀는 어김없이 오십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마야코프스키의 불같은 질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것이 법적인 남편이자 변함없는 파트너인 오십에 대한 배려라고 보기는 어렵다. 15년의 시간 동안 그녀는 오십과 마야코프스키 아닌 수많은 남자들과의 ‘여흥’을 즐겼던 것이다. 물론 마야코프스키 또한 적지 않은 여자들을 만났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릴리를 갈구했고, 질투를 멈추지 않았으며(오십에 대한 질투는 더 이상 하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앤과 새뮤얼 차터스는 이렇게 쓴다.

릴리와의 사랑은 ‘바지 입은 구름’이나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 어떤 비극>에서 보았던 순교자로서의 시인의 환상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주었다. 사랑에 대한 욕심이 끝이 없었던 그의 감정 상태에서는 죽음만이 오직 가능한 결말이었다. 저항할 길이 없는 이러한 감정의 역류에 휩쓸린 채로 그는 릴리에게 매달렸다. 그는 최후의 사랑을 찾아서 천국과 지옥도 불사하는 영웅적인 반역자로서, 자기의 상대역을 해낼 완벽한 여자로서 그녀를 점찍었던 것이다. 과연 그녀가 그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62쪽

사랑스런 연인과 미친 여인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던 그녀의 변덕을 맞추기 위해 마야코프스키는 필사적으로, 때때로 절망적으로 노력했다. “새 시를 쓰라고 브릭이 주는 돈으로 마야코프스키는 릴리를 위해서 꽃으로 방을 장식하고 그녀가 좋아하는 케이크도 사주었다.” 말하자면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가 느낀 그 모든 감정의 파고는, 어지러운 마음의 소용돌이는, 고스란히 시가 되었다.

그녀는 분명 마야코프스키가 자신에게 기대한 그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지만(“내게는 한 사람에게 아교처럼 붙어 있을 능력이 없어요. 난 어디에 매여 있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어쩌면 마야코프스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시 말해 결코 그녀를 온전히 소유할 수 없었기에 그토록 그녀에게 매달린 것은 아니었을까.

마야코프스키가 생각하기에 “시인이란 작가가 아니라, 서정시의 실체이며, 세상을 제일 먼저 몸으로 체험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릴리는 마야코프스키에게 그가 몸으로 체험하는 세상, 그 자체였다. 그것이 없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녀가 관계되는 일이면 무엇에나 그는 괴로운 질투를 느꼈다. 그것은 ‘그가 시의 주제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가슴을 훔쳐간 그대
가슴속에 모든 것을 빼앗아간 그대,
나의 재능을 거두어 가오.
어쩌면 난 결코 다른 어떤 창조도 못할 테니……

                                             -<척추 피리>

6.
한편 오십과의 관계는 그에게 또 다른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문을 열어주었다. 바로 공적인 세계. 그는 마야코프스키의 시집을 출판했을 뿐 아니라, 그의 아파트에서 열리는 ‘문학 살롱’을 통해 그 자신 미래파 비평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그들은 밤새워 토론하고, 잡지를 발행하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점점 더 키워나갔다.

그리고 1917년 10월(구력 기준), 혁명이 시작되었다. 마야코프스키는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마치 자기 집에 들어가듯이 혁명 속으로 뛰어들었다.” 점점 급박하게 변해가는 상황 속에서도 마야코프스키는 “지칠 줄도 모르고 새로운 사회에서의 미래파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는 여전히 요란하게 자기를 내세웠다. 행동하는 것은 사춘기 아이들 같았다. 그리고 그는 대중 앞에서 하는 연설에는 타고난 재주가 있었다.” 열두 살의 나이에 자갈을 입에 물고 연설을 연습하던 그다. 그의 연설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 자신조차 스스로의 연설에 감동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마야코프스키의 모습에 모든 사람들이 감동한 것은 아니었다.

파스테르나크는 그의 난폭한 행동과 사춘기 소년 같은 감정의 폭발과 엉뚱한 성격 그리고 젊고 재능 있는 훌륭한 다른 시인들이 자기를 추종해주기를 바라는 그러한 기질도 다 받아들이면서까지 마야코프스키를 숭배했다. 그러나 그 순간 파스테르나크는 마야코프스키로부터 처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객관적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의 친구가 결정적인 오류를 범했음을 알았다. 미래파 예술의 중심이 된 것은 마야코프스키 그 자신이었다기보다는 시인의 뒤처진 생각이 만들어놓은 낭만적인 영웅이었다.
62쪽

그러거나 말거나, 마야코프스키는 이 위원회다 저 작가모임이다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활발한 사회 활동을 펼친다. “볼셰비키 인민교육위원회가 발행하는 잡지 <코뮌 예술>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아방가르드의 유산을 혁명 정부가 이용할 수 있도록 미래주의자 및 형식주의자들과 함께 <좌익 예술 전선>을 창간하기도 했다.” 브릭과 마야코프스키는 일종의 문화권력을 쥐게 되었고, 그들 또한 그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아무 관심도 없었다고 해야 할까.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그들의 예술이 새로운 러시아 문화운동의 중심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미래파의 예술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들은 문화의 독재도 서슴지 않을 생각이었다. (차터스 부부는 이룰 두고 “그들이 정치적 독재자가 아니었기에 망정”이라고 썼다.) 마야코프스키는 말한다.

“왜, 어째서 문학은 한쪽 구석으로 몰려야 하는가? 그것은 모든 신문에, 매일같이, 모든 페이지마다 실려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디저트 정도로만 내놓는 문학 따위라면 죽어버려야 한다.”
137쪽

7.
1920년대에 들어 마야코프스키는 자신의 재능을 ‘로스타(러시아 전신국의 약자)’의 선전부를 위해 쓰기 시작한다. 그는 수천 장의 풍자화, 표어, 짧은 노래 광고 등의 ‘슬로건 예술’을 미친 듯이 ‘생산’하며 그것을 혁명에 봉사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거의 모든 창조력을 ‘슬로건 예술’에 쏟아 부었지만, 시작을 멈추지는 않았다. 특히 그는 언젠가 고리키가 주목했던 풍자적 재능을 한껏 발휘했는데, 그중에는 (본래 그와 미래파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레닌의 마음을 사로잡은 ‘회의광’이라는 시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야코프스키가 만든 로스타의 포스터 중 하나

시 속 화자는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관청에 방문하지만, 담당자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각종 회의에 참석하느라 자리를 비운 탓에 매번 헛걸음만 하고 만다. 마침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그는 회의장을 박차고 들어가 거친 욕설을 내뱉는다. 그런데 이런,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은 몸이 반쪽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깜짝 놀란 그에게 비서가 조용히 속삭인다.

“그는 한꺼번에 두 군데 회의에 참석 중이십니다.
우리는 하루
스무 군데 정도 회의에
참석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자연히 몸이 둘로 나누어져야만 하지요.
허리까지는 이곳에 참석하고
나머지는
저곳에.”

절망에 빠진 화자는 이렇게 절규한다.

“오,
모든 회의를 폐지하는 것에
관한
회의를
한 번 더 했으면!”

마야코프스키는 로스타에서의 선전업무를 지속하는 한편 출판과 강연을 위해 해외를 오가며 20년대의 몇 년을 보냈다. 몇 편의 희곡을 썼고, 제법 인기몰이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러시아에서 그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레닌의 신경제 정책(NEP) 도입 이후 점차 변하기 시작한 정세는 24년 레닌의 사망 이후 급격하게 변해버렸다. 새롭게 등장한 소브루주아와 마야코프스키가 그토록 증오했던 해묵은 관료주의가 혁명의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릴리와의 관계에서도 변화는 있었다. 언제나처럼 (릴리가) 밀고 (마야코프스키가) 당기기를 반복하던 그들의 관계는 1925년 마야코프스키가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그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사랑했지만, 더 이상 육체적인 관계는 맺지 않게 된 것이다. 뭐, 그리 놀랄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릴리와 마야코프스의 주위에는 적당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많은 ‘파트너’들이 차고 또 넘쳤으니까.

그리고 스탈린이 등장한다. 스탈린은 물론 마야코프스키와 미래파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회는 점점 더 교조화되고 있었다. 마야코프스키는 여전히 정부의 문화적 대변인은 자신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단지 그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정부도, 대중도 더 이상 그의 말과 글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해외를 떠돌았다. 파리에서는 릴리 이후에 처음으로 그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은 여인 타치아나를 만나 그녀에게 구혼하지만, 그녀에게 마야코프스키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수많은 구혼자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들 대부분은 마야코프스키보다 젊었고, 부자였다. 당시 상심에 젖어 있던 마야코프스키를 만난 화가 유리 아넨코프는 이렇게 증언한다.

마야코프스키는 내게 언제 모스크바로 돌아갈 생각이냐고 물었다. 화가로 남아 있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그 생각은 해본 지 오래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는 내 어깨를 흔들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난 돌아갑니다. 난 이제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랍니다.”
그때 갑자기 극적인 장면이 벌어졌다. 마야코프스키가 흐느끼며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난 서기가 되었소.” 식당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울먹이자 깜짝 놀라 우리에게로 달려왔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자 마야코프스키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작은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려서요.”
281쪽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시인이 아닌 서기라고 말했다. 비단 사랑만이 아닌 혁명과 예술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자리가 점차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고, 울었다. 때마침 작은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것이다.

8.
1929년 4월, 비자가 만기된 그는 러시아로 귀국한다. 타치아나를 설득해 결혼 약속을 받아낸 그는 10월이 되어 다시 파리로 갈 수 있기를, 그리하여 그녀와 결혼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대수롭지 않은 연애사건이라고 생각했던 릴리는 전과 다른 마야코프스키의 진지한 모습에 강한 질투심을 느낀다. 하지만 마야코프스키가 영화촬영장에서 만났던 젊은 여배우, 노라 폴론스카야에게 몇 달 전 타치아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전에 없던 열정으로 매달리기 시작하자 릴리의 질투심은 곧 사그라진다. 릴리에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럴 수도.

그렇다면 마야코프스키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시 그는 무엇보다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절실하게, 차라리 절망적으로. 하지만 두 여인 중 누구도 그의 마음을 향해 걸어오진 않았다. 젊은 여배우는 그와의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음으로써(나중에야 그녀가 말라리아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9월, 타치아나는 편지를 보내 마야코프스키의 비자가 거절당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절망했다.

마야코프스키는 자신을 다잡기 위해 다시금 일에 몰두한다. 완성한 희곡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극단 사람들을 만나며 바쁘게 움직였다. 더 나빠질 것도 없을 것 같았던 상황이다. 하지만 신은 우리를 위해서 최악이라고 생각되는 상황에도 그보다 더한 최악을 남겨두시는 법이다. 10월 초가 되자 외교관으로 해외에 나가있던 뒤플레시스 자작이라는 젊은 남자가 파리로 돌아왔고, 타치아나에게 구혼을 하던 수많은 남자 중의 하나였던 그는 그녀에게서 결혼 승낙을 받아낸다. 결혼식은 두 달 뒤, 12월이었다. 고국에 발이 묶인 마야코프스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릴리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쓴다.

마야코프스키는 자주 외롭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었고, 친구가 없었기 때문도 아니었으며, 좀더 명성이 필요해서도 아니었다. 시가 발표되면, 사람들은 그의 시를 읽고, 홀을 꽉 메운 청중들은 그의 시에 귀를 기울였다. 그를 사랑하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는 대양의 물방울과도 같은 것이었다. 브릭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영혼 속에 만족할 줄 모르는 도둑이 들어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시를 읽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의 시를 읽고, 자기의 강연회장을 피해가는 사람들이 자기의 시를 들어야 하며,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들이 자기를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가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281쪽

사랑이 실패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연이은 실연은 그를 좌절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연극 또한 실패했다. 정부의 주요 인사들을 풍자하며 소비에트의 정치제도를 웃음거리로 삼았던 <목욕탕>을 본 관객들은 아무도 웃지 않았다. 웃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마다 그의 작품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작품 이십 년’ 전시회 또한 실패했다. 처참한, 그리고 완벽한 실패였다. 일련의 실패들은 마야코프스키에게 단순한 실패가 아니었다. 지난 시절 그가 자신의 인생을 걸고 얻으려 했던 사랑과, 혁명, 그리고 예술이, 그러니까 그 자신의 전존재가 실패한 것과 다름없었다.

마야코프스키는 몸부림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이 이끌던 ‘레프(좌익예술전선)’은 물론이고, 그들에게 속하지 않은 다른 모든 그룹들을 싸잡아 비난하던 ‘라프(프롤레타리아 작가 동맹)’에도 가입한다. 하지만 라프는 마야코프스키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적하기는커녕 제대로 된 작품 하나 쓴 적 없는 그곳의 작가들은 마야코프스키를 아무것도 모르는 신참으로, 이류 작가로 취급하며 도덕과 예술을 가르치려 들었다. 마야코프스키의 친구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전향’을 비난했다. 마야코프스키의 고독한 몸부림은 그 자신을 더욱 더 고독하게 할 뿐이었다.

9.
1930년 2월, 오십과 릴리 브릭은 런던으로 여행을 떠난다. 홀로 남은 마야코프스키는 다시 한 번 전시회를 개최한다. 이번엔 라프의 소속 작가 신분이었다. 하지만 “라프를 비롯한 어용 작가 그룹에서는 섬뜩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전시회의 실패를 연애에서 만회하려는 듯 마야코프스키는 노라 폴론스카야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그에게 싫증이 난 상황이었다. 그녀는 극단의 젊은 남자 배우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질투로 불타오른 마야코프스키의 집요한 청혼을 모두 거절했다. 그렇지만 데이트까지 거절하지는 않았다.

마야코프스키는 여전히 강연과 모임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핼쑥한 얼굴, 불안한 정서, 점점 깊어만 가는 우울.” 그는 신경쇠약으로 입원까지 하지만, 나아지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1930년 4월 11일, 마야코프스키는 난생 처음으로 약속된 강연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매니저였던 라부트는 그의 행방을 수소문하지만 찾지 못하고, 결국 강연자가 아프다는 핑계로 강연회는 취소된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아파트를 찾은 라부트는 침대 속에 있는 마야코프스키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뭔가 쓰고 있었다. 문간에 서 있다가 가까이 가려고 하니까 갑자기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옮아요.” 나는 깜짝 놀랐다. 나하고 같이 여행을 다닐 때도 그렇게 많이 아팠지만 그때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야 난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305쪽

그날 저녁, 노라를 집으로 부른 마야코프스키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당국에 보낸 편지에서 당신을 나의 가족으로 생각한다고 썼소.” 그녀가 차갑게 대꾸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그렇지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때에만 제 얘기를 해주세요.”

다음 날 마야코프스키는 노라를 만나기 위해 극단을 향한다. 다짜고짜 드라이브를 청하는 마야코프스키. 하지만 노라는 연습이 있어서 안 되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마야코프스키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들고 있던 지팡이로 의자를 내리치며 커다랗게 웃는 것이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니오!”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하는 마야코프스키. 그는 소리쳤다. “아니오?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는 ‘아니오’라고 말하지. 오직 ‘아니오’라고. 어디를 가나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온통 ‘아니오 뿐이야!” 그리고는 몸을 돌려 극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시 하루가 지났다. 노라와 함께 친구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한 그는, 자고 가라는 친구의 권유를 뿌리치고 정부 출판국 사무실 근처의 작은 방으로 돌아온다. 새벽 세 시였고, 그의 곁에는 노라가 있었다. 그것이 노라와의 마지막 밤이었다.

아침. 마야코프스키는 노라에게 자신을 혼자 두고 가지 말라고 했다. 아니, 소리쳤다. 하지만 노라는 연극 연습을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녀로서는 처음 맡은 주요 배역이었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그를 협박하기도 했다. 결국 노라는 열 시가 조금 넘은 시간, 그를 남겨두고 방문을 나섰다. 그리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배역을 향해 걸어갔다. 또각 또각 또각. 하지만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다.

이윽고 총성이 복도를 가득 채웠고, 피가 온 방을 적셨다. 그녀는 소리를 질렀고, 차마 문을 열수 없어 힘없이 주저앉았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몇 분 후면 복도는 사람들로 가득 채워질 것이었다. 앰뷸런스가 도착했고, 사람들은 어느새 차갑게 식어버린 주검 옆에 놓인 유서를 볼 수 있었다. 이틀 전, 라부트가 찾아왔을 때 쓰고 있던 바로 그 편지였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성실한 유대인 매니저에게로 옮을까 두려웠던 것일까?

10.
여러분 모두에게
나의 죽음에 대해서 그 누구도 탓하지 마오. 그리고 이야깃거리로도 만들지 말아주오. 죽은 자는 가십을 싫어하오.
어머님, 누이, 동지들이여, 나를 용서하오. 이게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여러분에게는 이 방법을 권하고 싶지 않소) 나로서는 다른 출구가 없었소.
릴리, 나를 사랑해주오.
정부 동지, 릴리 브릭과 어머님, 누이들 그리고 베로니카 비톨도프나 폴로스카야가 나의 가족이오.
이들에게 윤택한 생활을 보장한다면 고맙겠소.
완성하지 못한 시는 브릭 부부에게 주시오. 그들이 알아서 할 것이오.
그들 말대로, “사건은 끝났소.”

    사랑의 배가
      나날에 부딪쳐 부서졌다.
    삶과 나는 이해도 득실도 없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준
    상처와,
      아픔과,
        멸시를 일일이 헤아려도
              승부의 득점은 없구나.

그대들 모두에게 최고의 행운이 깃들기를!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4/12/30

프롤레타리아 작가 연맹의 동지들, 나를 겁쟁이라 생각 마오.
정말, 어쩔 수 없엇소.
안녕히!
에르밀로프에게는 게시판을 떼서 대단히 미안하다고 전해주시오 -- 우린 끝까지 싸웠어야 했소.
                                V.M.

책상 서랍에 2,000루블이 잇소. 그 돈으로 내 세금을 내기 바라오. 연방 출판국에서도 받을 돈이 있소.

11.
그러니까 바로 그것이, 1930년 4월 13일 아침 10시 경, 시인이 명료한 의식을 갖춘 채, 손을 들어 오직 한 발뿐인 총탄을 자신의 심장을 향해 겨눌 때, 마침내 방아쇠를 당길 때, 눈앞에 있는 자신의 육체=영혼의 죽음을 응시할 때, 그 자신의 내면에 안고 쓰러진 것들이었다.

그의 바람과 달리 그의 죽음은 이야깃거리가 되어 소비에트 연방을 떠돌았다. 그것도 순식간에. 그의 명성을 둘러싼 몇 번의 조정 작업도 있었다. 그는 어느 순간 인민의 영웅이 되었고, 다음 순간 철지난 낡은 외투가 되었다. 그럴 만도 하다. 어느새 그의 죽음과 우리 사이에는 70년이 넘는 시간이 놓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은, 그저 추문일 뿐이다.
사건은 끝났고 우리에게 남은 전부는 그가 남기고자 한 것들뿐이다.
그는 분명, 이렇게 썼다.

릴리, 나를 사랑해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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