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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렵한 문고본으로 만나는 문학의 숨은 영토

책세상 2012.05.07 10:19
‘책세상문고·세계문학’을 말하다

책이 귀해 늘 아껴 읽어야 했던 탓일까. 어린 시절의 애틋한 사랑이었던 세계문학전집은 내게 추억이며 동경이자 또 한편으로는 결핍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제2의 전성기’라는 수식 아래 다양한 개성의 여러 시리즈가 경합하는 오늘, 나를 비롯한 독자들은 어떤 결핍의 기미 없이 세계문학의 다양한 면모를 향유하는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그 미적·지적 향유의 즐거움이 고단한 우리 삶에 위안이 되고, 딱딱하게 굳은 사유의 지층을 깨뜨릴 ‘망치’가 되리라 기대한다.

2002년 출발한 ‘책세상문고·세계문학’은 이름 그대로 문고본이다. 1990년대 이후 새롭게 출간된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아마도 외형과 가격이 가장 날렵할 것이다. 이는 ‘책세상문고’의 다른 두 축인 ‘우리시대’와 ‘고전의 세계’가 그렇듯이, 작은 판형에 담은 깊이를 통해 일반 독자들이 ‘널리, 제대로’ 좋은 작품을 접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 이 시리즈의 일차적인 지향이기 때문이다. 판형과 가격이 ‘널리’를 구현하는 요소라면, 텍스트 엄선과 해당 작가 전공자의 전문 번역은 ‘제대로’를 위한 장치이다.
책세상문고·세계문학

‘책세상문고·세계문학’은 ‘세계문학=서구문학인가’라는 질문에 치열하게 응전하고자 한다. 세계문학은 특정 언어와 대륙이 지배하는 수직적 영토가 아니다. 영미와 유럽 몇몇 국가에 치우치지 않고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문학 등 명실상부한 세계문학을 지향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문학 시리즈의 공통된 특성일 것이다. ‘책세상문고·세계문학’은 이 질문을 비교적 일찍 제기한 주체로서, 그 안에 담긴 문제의식을 체현하고자 애써왔다. 이러한 고민과 실천의 중심에 한국문학이 있다. 시리즈의 첫 권이 장용학의 작품집 《요한 시집 외》라는 사실은, 우리 문학을 빼고 전집의 목록을 꾸리는 관행을 넘어서는 가운데 세계문학의 지평에서 한국문학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공유하려는 지향을 상징한다. 한국 4권, 중국 2권, 일본 4권, 동유럽 2권, 러시아 4권, 스페인 5권, 영국과 라틴아메리카 각 1권, 미국 4권, 독일과 프랑스 각 7권. 지금까지 출간된 41권 목록의 면면이다. 종수를 빠르게 늘리지 못한 대신, 다양성과 총체성 그리고 균형 감각과 주체성이라는 기획의 초심을 잃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물론 문학의 다양성은 단순히 언어나 지역의 안배로 확보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책세상문고·세계문학’은 독자들의 선호가 이미 확인된 유명 작가의 유명 작품보다는 덜 알려졌지만 세계 각국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텍스트, 특정 작품으로 대표되는 작가의 숨은 걸작, 실험성과 전복성으로 문학사에 충격을 준 작품 등 세계문학의 숨은 광맥을 탐사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또한 소설 편식 현상을 벗어나 다른 장르의 비중을 높임으로써(시와 희곡 등 비소설 장르 비중이 약 30퍼센트이다) 독자들이 문학 형식의 다채로움을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유럽 중세 문학을 대표하는 스페인 극작가 칼데론의 희곡집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살라메아 시장》, 중국 청나라 시대 자전소설의 백미인 심복의 《부생육기》, 소련의 혁명 시인 마야코프스키의 시선집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관련 글 보기), ‘미국의 보르헤스’라 불리는 포스트모던 소설의 선구자 바셀미의 장편소설 《백설 공주》, 사전 형식을 통해 언어와 사고 및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풍자를 극대화하는 플로베르의 《통상 관념 사전》(관련 글 보기), 잔혹극 형식으로 20세기 전체주의의 폭력을 그린 옛 유고 작가 키슈의 《보리스 다비도비치의 무덤》…. 다양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다양한 삶의 겹과 층을 보여주는 세계문학의 영토는 계속 확장 중이다.

‘책세상문고·세계문학’은 동서와 고금, 이념과 장르를 넘어 문학이라 불리는 모든 형태의 텍스트를 선보이고자 한다. 쌓인 목록이 아직 많지 않고 행보가 더디지만, 전집 시장의 결손된 한 부분을 채우며 독자들과 문학의 힘 문학의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참, 책의 말미에 실리는 ‘작가와의 가상 인터뷰’도 놓치지 마시길. 딱딱한 해설 대신 친밀하고 생생한 어조로 작가의 내면과 작품 세계를 안내받을 수 있다.

<대표작 3권 소개>
요한 시집 외
장용학 지음

한국 전후문학의 대표 작가인 장용학의 작품집.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 삶을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쓴 <요한 시집>, 세상을 저주하며 사는 언청이를 내세워 정신을 가두는 육체에 대해 고찰한 <육수>, 박정희 정권의 야만성을 비판한 미발표 유작 <천도시야비야> 등 다섯 편을 수록했다. 낯선 국한문 혼용체,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문장으로 비인간적 세계와 뒤틀린 사회 현실을 그려내는 장용학의 소설을 읽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요즘 소설이 주기 힘든 강렬한 독서 체험을 선사한다. 비극과 오욕과 절망의 시대에 인간은 누구이며 문학은 무엇인가를 성찰했던 큰 작가의 사유가 안온한 우리 일상에 일격을 가하는 듯하다.

바자제·페드르

장 라신 지음, 심민화 옮김

17세기 프랑스의 극작가 장 라신의 희곡집. 오늘날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상연되는 작품인 <페드르>는 숙명적 사랑으로 인해 파멸에 이르는 인간의 모습을 아름다운 시로 노래한 고전 비극의 걸작이 다. 자신의 죄를 뚜렷이 자각하면서도 의붓아들 이폴리트를 향한 정념을 이기지 못하고 파국으로 치달아 마침내 처절하게 죽어가는 페드르의 모습은 어쩔 수 없이 매혹적이다. 숙명에 저항하지만 극심한 정념에 사로잡혀 내적 갈등을 겪다 정점에 이르러 단숨에 무너지는 라신의 인물들이 인간 본성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한다.

네이키드 런치
윌리엄 S. 버로스, 전세재 옮김

‘비트 제너레이션’의 대표 작가이자 반문화의 상징적 인물인 버로스의 자전적 소설. 1962년 출간 당시 외설 시비로 미국 사회에 ‘문학 검열’이라는 이슈를 제기했던 문제작이다. 마약 중독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현대 사회의 추악한 정경과 야만적 위선을 냉소적 유머로 조롱한다. 버로스에 따르면 ‘Naked Lunch’란 “모든 포크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모든 사람들이 보게 되는 그 얼어붙은 듯한 순간”이다. 어떤 위장이나 기만도 없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바라보는 것. 당신은 당신 자신을, 이 세계를,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작품을 이렇게 투명하게 바라볼 준비가 되어 있는가.

_편집장 眐

*《기획회의》 278호 ‘세계문학전집’ 특집에 실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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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Comments
  • 프로필사진 문학을위하여 2012.05.23 13:40 신고 이제 막 이런 출판사의 이런 좋은 작품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2007년인가?를 끝으로 더이상 세계문학 시리즈가
    나오지 않고 있더군요. ㅠㅠ
    이제 끝난 건가요...?
    미시마 유키오의 <파도소리>도 못 보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bkworlds.tistory.com BlogIcon 책세상 2012.05.24 09:52 신고 네 그 뒤론 출간 상황이 어려워져서..흑흑
    그래서 문학을위하여 님처럼 독자 분들께서 더 많은 관심 가져주시면..하는 작은(큰?) 바람을 담아 소개해드렸습니다. 저희도 앞으로 계속 좋은 작품들로 만나뵙고 싶으니까요~
  • 프로필사진 노찬균 2012.06.23 03:53 신고 아쉽네요.. 정말 다른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들과는 다르게 다양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와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어 정말 좋았는데요.. 반대로 말하면 유명하거나 잘 팔릴만한 책이 아니라는 어찌보면 우리나라 독자들의 편향적이고 협소한 독서 습관이 더 이상 이 시리즈가 계속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어버렸네요.. 저도 [파도소리]를 제외하고는 다 구매를 하였는데.. 그나저나 파도소리는 오디에서나 구할 수 있을까요?^^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bkworlds.tistory.com BlogIcon 책세상 2012.06.25 13:09 신고 노찬균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말, 이라는 수식어에 마음을 다 담을 수 없다는 것이 참 속상할 정도네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파도소리>는 절판된 상황이고 저희쪽에도 재고가 없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흑.ㅠㅠ
  • 프로필사진 노찬균 2012.07.05 04:33 신고 네..뭐 언젠가 중고로라도 아니면 우리나라 독자들이 책세상 세계문고의 진면목을 알아 다시 책을 찍어낼 날이 있겠죠.. 사실 제가 책 세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j.m.coetzee의 [포,foe]가 책 세상에서 출판되면서부터였는데, 그 책만이 쿳시의 책을 대부분 번역하신 왕은철 교수님이 번역을 하시지 않은것이 특이했고 어쨋든 이런저런 이유로 책 세상의 책들과 계속 만나게 되었네요. 앞으로도 좋은책들 많이 세상에 내놓아 주세요.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bkworlds.tistory.com BlogIcon 책세상 2012.07.09 09:37 신고 네 감사합니다. 좀 더 힘을 내서 차별화된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계속 출간될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 저희 다른 책들도 관심 많이 가져주세요. ^^*
  • 프로필사진 노찬균 2012.07.10 02:10 신고 안그래도 이번주에 고전의 세계 50권 세트 주문하려고 생각중이에요.ㅎㅎ 카뮈전집도 예전에 나온거 몇 권 빼고는 다 구입했는데 품절되기전에 나머지도 구매해야겠네요..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bkworlds.tistory.com BlogIcon 책세상 2012.07.10 10:32 신고 호옷,
    책세상 VIP 카드라도 발급해드려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저희 책들이 모쪼록 든든하고 맛있는 양식이 되기를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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