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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 이야기/시로 여는 세상

지문을 들여다보다

책세상 2013.10.28 18:07


지문의 세공

백상웅


지문 없는 세공사에게는 격동이 없다.
강도 높게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같은 거, 그럭저럭 빛나는 돌 같은 거,
갈고 자르며 육면체가 태어나는 시간에
세공사의 지문이 사라진다.
 
우리가 다른 무늬를 가진 것은 세공사의 고요 때문일지도 모른다.
전직 세공사였던 나의 외삼촌 경우가 그렇다.
고요 때문에 외가의 무늬는 복잡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출생을 지우려고,
머리가 일찍부터 벗겨지기 시작한 외삼촌은 밤낮없이 보석을 깎았다고 본다.
지문이 다시 생겼다는 외삼촌,
요즘 격동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하나 만나보지 못했다.

내가 듣기를, 언젠가 보석은 종족을 다스리는 제사장의 신비로운 무기.
또 언젠가 보석은 굴러가는 돌 따위,
이제는 아름다운 우리들의 도구.
오늘도 세공사는 단단하게 빛나는 시간을 깎는다.
 
우리도 조용히 지문을 바꿔보려고 한다.
불변의 그것은 잠시 사라질 뿐이다.
우리가 문득 슬픔을 느끼며 길을 걷는 건
평생 변할 수 없다는 출생에 대한 각인 때문이다.
나의 외삼촌이 세공 일을 접고 육면체의 근육 속에 갇혔듯이.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손을 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현생인류의 화석들을 보면 호모 하빌리스가 가장 오래된 인류라고 합니다.
인류는 손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발전해왔지요. 지문이라는 건 손을 '어떻게' 사용해왔느냐의 문제가 아닐까요.

지문을 내려다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던데,
지문도 제가 책임져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민등록증을 처음 만들 때 이후로 지문에 대해서 생각해 본 것은 처음이네요.

시를 다시 읽고 또 읽어보니
아무래도 이 시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가업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공사의 길을 택했던 외삼촌.
하지만 결국 '슬픔을 느끼며 길을 걷게 된' 화자의 외삼촌.

담담히 저도 저의 보석을 깎아야 겠습니다.
그럼 제 지문도 곧 닳아 없어질런지. 


영업기획부 박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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