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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 이야기/시로 여는 세상

여름 휴양지에서-

책세상 2014.05.21 09:41


여름 휴양지에서

고진하

 
푸른 미루나무 그늘을 따라 시계바늘처럼 뱅뱅 돌며
키 작은 쪼록싸리를 꺾어 깔고 앉아
고스톱으로 시간을 죽이던 벌거숭이들, 그것도
이젠 지겨워진 모양이다

흐르는 물속에 띄워 놓은 파라솔 속으로 뛰어들어
아예 돌을 베개 삼아 벌렁 누워
여기가 열반이지 열반이 따로 있나, 제법
느긋한 사념을 즐기는 듯한 패도 있고
더러는 유년시절에 익힌 서툰 헤엄 솜씨로
귀여운 송장헤엄치개처럼 물 위에 누워 허우적거리거나
까맣게 등비늘이 반짝이는 물땅땅이들이 되어
텀벙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새
서산의 긴 그림자가 강안에 드리워지는 해거름녘
하얀 모래톱에 나와 앉아
제 짝을 등에 업은 까만 물잠자리의 낮은 비행과
물면 위에 떠 흐르는
고운 줄무니의 새털구름을 넋나간 듯 바라보며
새털구름을 밟고 내리는 짙은 황혼 속에
영원히 잠들어 버리고 싶다는 상념에 문득 젖어 보기도 하지만

이젠 떠나야 할 시간
고스톱도 열반도,
돌베개, 새털구름도 저무는 강펄에 남겨두고
텐트를 걷어 짐을 꾸리다 먼 발치에서 본
핏물과 모래알이 뒤범벅 된 썩은 물고기를 끌고 가느라
바둥거리던 한떼의 일개미들처럼
다시 일터를 향해, 뿔뿔이,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는 둑길을 차며 떠나야 하는
 


시인: 고진하
1953년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나다.
감리교신학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1987년 《세계의 문학》에 「빈 들 」, 「농부 하느님」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다. 




* * * * * * * * * *

* 2014년 5월 19일 주간업무회의에서 편집부 1팀 장지은 씨가 발표한 시입니다.
여름 휴가를 떠나 강가에 누워 정경을 둘러보는 화자의 모습이 그림처럼 눈에 선한 작품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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