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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가 담긴 술 한 잔을 권하는 고전 단편 《거룩한 술꾼의 전설》

책세상 2015.12.22 14:00


《거룩한 술꾼의 전설》
요제프 로트 지음, 파블로 아울라델 그림 | 김재혁 옮김 | 책세상



지난 주말에 어쩌다 보니 영화 〈나니아 연대기〉를 보게 되었다. 유명한 판타지 소설이 원작이라는 것 말고는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는데, 주인공 페번시 가의 4남매가 2차 세계대전의 폭격을 피해 방공호로 숨는 것이 첫 장면이어서 깜짝 놀랐다. 아이들을 주 관람층으로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영화가 전쟁 폭격 장면으로 시작하는 게 어찌나 낯설던지……. 눈앞의 영화 장면들과 무관하게 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인들의 삶에 대해서 상상하고 말았다.

오스트리아 작가 요제프 로트를 이야기할 때도 세계대전을 빼놓고 이야기가 불가능하다. 그는 1894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서 태어났으나 1차 세계대전 와중에 제국이 몰락하고 공화국이 성립되는 것을 보았고, 1933년 독일에서 나치스가 정권을 잡자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 1939년 생애 마지막 해에 오스트리아가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독일에 합방되는 것을 타국 프랑스에서 지켜보았다.

이토록 어지러운 세상을 살다 간 탓일까. 요제프 로트는 생전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열렬한 애주가였다. 그래서 “술은 결과적으로는 생명을 단축하지만, 단기적으로 볼 땐 사람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말을 처음 읽었을 때, 몹시 공감하고 말았다. 스트레스를 삼시세끼처럼 챙겨 받는 유리 멘탈을 가져서, 서른 길목에 재미 삼아 점집에 들렀더니 술이라도 마셔서 풀지 않으면 울화병에 걸릴 사주라는 말을 듣고 헛웃음을 지었던 사람으로서 말이다.

"이게 내 본모습이지.
화나고 취해도 분별을 잃지 않는 거야."

1938년 11월, 파리
요제프 로트



요제프 로트가 생애 마지막 해에 망명지 파리에서 바와 카페를 전전하며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을 알코올로 다시 피워 올리며 집필한 마지막 작품 《거룩한 술꾼의 전설》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주인공 안드레아스에게 괜찮다, 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잔해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 시내 모 서점 매대에 놓일 짧은 카피를 써달라는 청이 들어왔을 때, 나는 망설이며 이렇게 썼다.


“괜찮아, 오늘도 고생했어.”

위로가 담긴 술 한 잔을 권하는 고전 단편.


그냥 서점 안을 서성이는 많은 분들에게, 그리고 오늘이라는 날들을 서성이고 있는 나 자신에게 “괜찮아”라고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룩한 술꾼의 전설》은 1934년 봄의 파리를 배경으로, 센 강 다리 밑에 노숙하는 폴란드 이주 노동자 안드레아스의 삶에 연이어 벌어지는 기적들을 모티브로 삼아, 시대와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 개인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 생각하게 하는 짧은 노벨레이다. 텍스트 사이사이에 에스파냐 일러스트레이터 파블로 아울라델의 삽화가 곁들여졌는데, 안드레아스의 모던한 표정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술꾼 안드레아스가 자신의 삶에 우연히 찾아온 기적을 통해 오늘과 다른 내일을 꿈꾸게 되지만, 술 때문에 결국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지 못하고, 다음 날 눈뜨면 다시 오늘과 다른 내일을 꿈꾸며 애쓰고, 그러나 결국에는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게 되는 것을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애썼지 않은가. 절망하지 않고 노력한 것만으로 대견하지 않은가.
  
눈만 뜨면 ‘구조조정’이라는 기묘한 간접화법을 구사하는 이들에 의해 각국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기사를 보게 되는 요즘 같은 불황의 시대에 무엇으로라도 오늘 하루 위로받을 수 있다면, 그걸 굳이 간암 한 병, 폐암 한 갑이라고 불러가며 박탈할 것까지 있을까. 그런 게 인간다운 삶일까. 잘 모르겠다. 나는 차라리 “괜찮아, 고생했어” 하며 술 한잔 건네고 싶으니까. 요제프 로트도 이런 마음으로 생애 마지막 넉 달 동안 이 짧은 이야기를 쓰지 않았을까. 아무리 힘들어도 절망하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다.



김경미 책세상 편집1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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