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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 이야기/편집자 분투기

옮긴이의 마음자리가 다르면 책도 달라진다

책세상 2016.01.20 15:48

《장자
장자 지음 | 조현숙 옮김 | 32,000원




사회생활이 길어지면서 효율과 성과라는 가치가 위장까지 침범한 탓일까. 《장자》의 역자 조현숙 선생과 처음 만나 마주 앉았을 때, 나는 스스로가 승냥이처럼 느껴졌다.


선생이 앉은 곳의 시간 흐름과 내가 앉은 곳의 시간 흐름이 달랐다. 나는 조급함을 내려놓기 위해 공연히 한숨을 내쉬었다. 재야에서 늦깎이 학생들과 함께 수년간 《장자》를 읽어오는 동안 늘 자신의 번역문을 복사 용지에 간이 출력해서 나눠주면서도 책 출간이 늦어지는 편집부를 질책 않고 기다려온 선생이었다.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선생의 조곤조곤한 말씀을 들은 지 5분쯤 지났을 때부턴가, 나는 다시 한 번 낯선 감각에 사로잡혀 살짝 당황했다. 선생의 마음이 몹시 뜨거웠기 때문이다. 목소리 한 번 키우지 않고 《장자》에 대한 크고 뜨거운 열정을 천천히 말씀하시는데, 나도 모르게 혹했다. 그래서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장자》의 원고를 읽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과 함께 《장자》를 내 인생의 책으로 꼽는다.






제자백가를 대표하는 고전이자, 유가와 더불어 중국 전통 사상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도가의 중심 텍스트인 《장자》는 그 행간이 넓고 깊다. 그래서 읽는 이에 따라 창조적 읽기가 가능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글깨나 읽었다 하는 수많은 문인들이 《장자》에 매혹되었던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당나라 현종은 장자에게 ‘남화진인(남방의 아름답고 천진스러운 사람)’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장자》를 아꼈고, 조선 후기의 박세당은 사문난적으로 몰리면서도 《남화경주해산보》라는 《장자》 주해서를 집필했다. 프랑스 철학자 라캉은 중국인 선생과 3년간 《장자》를 완독한 후 “난 이제부터 뭘 하지?” 했을 정도로 그 매력에 푹 빠졌었다. 톨스토이와 하이데거, 융, 부버 같은 서구의 여러 작가와 학자들은 손수 《장자》를 번역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국내에도 번역본이 열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장자의 글쓰기 방식이 독특한 탓에 역자에 따라서 번역문도 판이하다. 여기에 또 하나의 번역서를 보태며 조현숙 선생은 말한다. “내가 읽고 싶은 《장자》를 함께 읽고 싶은 마음에 번역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라고. 선생의 번역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선생이 말하는 “내가 읽고 싶은 《장자》”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우리 회사에서 제일 어린 직원인 이십대 초반의 마케터가 조현숙 선생의 《장자》를 읽고 있으면 마음이 정갈해지는 것 같다고 말해서 혼자 빙긋이 웃은 적이 있다. 모든 문장을 존대체로 옮겼다든지, 대화문을 희곡식으로 구성했다든지 하는 요소들이 아니라, 텍스트를 옮기는 이의 마음이 번역을 다르게 만들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닫힌 마음과 작은 앎에서 벗어나라”고, “담 없는 마을에서 노닐자”고 하는 장자의 말들을 한 줄 한 줄 옮기면서,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철학을 하려 했던 그 노력이 번역을 다르게 만들었다고 말이다.




편집자로서 책을 들춰볼 때마다 생각한다. 지금 책의 꼴이 선생의 그 마음을 제대로 담은 것일까. 마음으로 하는 철학을 담은 책은 어떤 꼴이어야 할까. 좋은 책을 만나면 편집자는 책이 나오고 난 뒤에도 이렇게 계속 고민하게 된다.



김경미 책세상 편집1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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