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책세상 블로그

무덤덤한 삶에 번개처럼 내리치는, 니체를 만나다 본문

책세상 책읽기/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무덤덤한 삶에 번개처럼 내리치는, 니체를 만나다

책세상 2011.12.28 11:50
우리는 왜 니체를 읽는가
정 동 호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리 건너 헌책방에 들렀다. 서가를 훑어보고 있는데 《철학논총》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꺼내 넘겨보니 니체, 칸트 등 몇몇 철학자의 삶과 사상을 소개한 책이었다. 니체가 맨 앞에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을 듬성듬성, 그래도 신경을 써가면서 읽었다. 거기에 “신은 죽었다”는 선언이 나와 있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자들의 주장은 들어봤지만 신의 죽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신이 존재했었지만 이제는 죽어 없다는 것이 아닌가. 집에 돌아와서도 신과 신의 죽음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그 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며칠을 그렇게 보낸 후 다시 그 헌책방에 들렀다. 책은 같은 자리에 꽂혀 있었다. 나는 곧바로 책을 샀다. 마치 비밀상자를 앞에 둔 아이처럼 흥분이 되었다. 집에 돌아와 서둘러 열었다. 중간 중간에 한자가 섞여 있기는 했지만 대충 짐작을 해가며 읽어 내려갔다. 어느 철학 교수가 쓴 것인데 다행히 글은 어렵지 않았다. 

니체는 삶부터가 흥미로웠다. 대를 이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24세 때 대학교수가 되었다. 10년쯤 지나 병으로 대학에서 물러나 이곳저곳 거처를 옮겨가며 글을 썼다. 그러다가 45세 되던 해에 정신질환으로 모든 활동을 마감, 나머지 10년을 절망적인 투병 생활로 보냈다. 그런 그를 두고 사람들은 미쳐 죽었다고 했다. 천벌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번개, 윌리엄 N. 제닝스 C.(1882)

그의 삶이 흥미로운 것이었다면 그의 사상은 충격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반복해서 읽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 내용을 그런대로 되살릴 수가 있다. 거기에 그 자신이 다이너마이트가 되어 지금까지 인간을 지배해온 사상적 유산을 남김없이 폭파해버리겠다는 구절이 있었다. 선과 악으로 되어 있는 도덕은 모두 가식이고, 천국 역시 환상에 불과하다는 ‘폭로’에 자연으로 돌아가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라는 권고도 있었다. 허무주의와 운명에 대한 사랑 이야기도 있고 위버멘쉬(초인)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와 함께 사육을 통해 인간을 고급화하자는 우생학적 주장도 담겨 있었다. 열등한 인간은 도태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섬뜩했다. 신의 죽음, 선과 악을 토대로 한 도덕의 파기, 허무주의, 운명에 대한 사랑, 위버멘쉬, 다이너마이트, 인간 사육 등이 내가 니체로부터 받은 첫인상이었다. 우리를 무서워 떨게 만드는,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마력으로 잡아끄는 죽음의 사자가 느닷없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일이지만 나의 니체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나는 대학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했다. 니체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니체가 나로 하여금 철학에 눈을 뜨게 한 철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무렵(1960년대 중반과 후반) 우리나라에서의 니체 공부에는 한계가 있었다. 강의를 할 수 있는 교수도 드물었고 책도 별로 없었다. 나는 졸업 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전공 주제를 정해놓고 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늘 니체가 있었다. 다행히 내가 유학한 대학에 니체 전문 학자가 두 분 계셨다. 내게는 기회였다. 나는 니체를 전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후 8년 가까이를 니체 공부로 보낸 나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 교수가 되어 현대 유럽 철학을 강의했다. 니체 강의를 많이 했다. 강의를 하면서 나는 니체처럼 정직하고 성실한 철학자가 또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없어 보였다. 그는 파란 하늘과 맑은 대기, 아침놀을 좋아한 철학자였다. 채식을 주로 한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처럼 단 것을 좋아한 철학자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그에게서 인간을 신에 대한 망상과 도덕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려 한 순교자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속 깊은 인간 사랑을 읽게 되었다. 이후 나는 니체에게서 더 이상 죽음의 사자를 떠올리지 않았다.
 
내게는 니체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버릇이 생겼다. 니체를 공부하더니 어느새 니체를 닮아가고 있다고 친구들은 비아냥대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런 안목을 제공한 니체에게 오히려 고마움을 느낀다. 니체는 번개가 되어 푸석푸석한 무덤을 깨부수겠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안다. 그리고 무덤덤한 삶 위에 내리칠 번개를 기대한다. 번개와 천둥, 니체는 그러나 머지않아 동녘이 밝아올 것이라고 했다. 그릇된 정신적 유산을 청산한 인간이 맞이할 새 아침이다.

Morning glow
철학은 모든 예술과 시가 의도하는 것처럼 삶을 '즐겁게 만들고자 한다' ㅡ아침놀, 제5권 427.

오늘날 우리나라 니체 독서 환경과 연구 환경은 많이 좋아졌다. 20년 전쯤 한국 니체 학회가 발족되었고, 21권으로 된 <니체전집>(책세상)도 우리말로 완역되어 나왔다. 논문도 많이 발표되고 있고 니체 연구서도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나도 요즘 뭔가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 공부를 정리하여 책으로 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완성 단계에 있다. 제목은 《니체》다. 니체 사상 전반을, 그러니까 신의 죽음, 가치의 전도, 허무주의, “자연으로 돌아가라!”, 운명에 대한 사랑, 힘에의 의지, 위버멘쉬, 인간 사육 등을 다룬다. 니체와의 만남, 새해에는 나 이 책을 통해 그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이 글은 책세상 <니체전집> 편집위원회 위원장이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유고(1884년 초~가을)》을 번역하신 정동호 선생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
정동호 |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책세상 니체 전집 편집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거쳐 지금은 같은 학교 명예 교수로 재직 중이다. 논문으로 <니체의 인과 기계론 및 목적론 비판> <변화와 존재 : 니체의 '반형이상학적' 존재론>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니이체 연구》(탐구당) 《오늘 우리는 왜 니체를 읽는가》(공저, 책세상)를 썼으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유고(1884년 초~가을)》을 번역했다. 

6 Comments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