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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주의 2.0을 위하여

책세상 2012.01.12 10:59
―《생태주의》 저자 에필로그


이상헌(한신대학교 교양과정 조교수)

후회 없는 일을 하기란 쉽지 않다. 순간의 선택이나 섣부른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긴 시간을 두고 작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을 경우, 후회는 더 무겁게 가슴을 짓누른다. 생태주의를 주제로 원고를 작성하는 데 햇수로는 무려 3년이 걸렸다.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일들 사이 주말이나 방학을 이용해서 생태주의에 대해 읽고 고민했다. 가장 큰 고민은 ‘생태주의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그리고 ‘범위를 어느 정도로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정치적 글쓰기의 괴로움
다른 학술적인 용어도 마찬가지겠지만, 특정한 명칭이 세상에서 인정을 받는 과정은 대단히 정치적인 문제이다. 특히 기후 변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신규 핵발전소 부지 선정, 4대강 사업 추진, 녹색당 창립 움직임 등을 둘러싸고 정치적 지형이 요동치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생태주의라는 용어가 가진 함의를 일목요연하게 밝히는 것은 그 자체로 정치적 행위와 같았다. 내가 선택한 정치적 입지는 이론과 실천의 결합이라는 다소 어중간한 입장이었다. 나름대로 생태주의 논의의 다양한 갈래들이 갖는 이론적 핵심과 그 이론들의 현실적합성을 최대한 조명해보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리 성공적인 것 같지는 않다. 주어진 책의 분량에 비해 다루려고 했던 생태주의의 갈래들이 너무 많았고, 한국의 현실은 어떤 작가의 괴기소설보다 더 비참하고 황당했다.

비참하고 황당한 ‘4대강 사업’과 ‘삼성 반도체 백혈병 사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태주의는 진화한다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고, 자의적인 수사와 판결이 횡행하며, 이웃 나라에서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핵발전소를 수출하고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들이 무리하게 추진했던 4대강 댐에서는 날림 공사로 균열이 발생했다. 최근에는 북한의 김정일이 사망하고, 녹색당이 새로운 정치적 대안 세력으로 부각되었다. 책이 출판된 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이러한 상황들이 전개되자, 책 말미에 제시했던 생태주의적 대안이나 제안은 너무 안일하거나 효용성이 떨어지는 주장으로 비춰지지 않나 염려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직하게 말하자면, 상황 탓만은 아니다. 여러 주제들 중에서 다른 것들을 소략하게 처리하더라도 실천의 영역을 더 자세히 다루지 못해서 현실 적합성이 떨어진 것도 있다. 예컨대, 오늘날처럼 사회적 양극화로 일반 대중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고통스러워지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기본 소득이라든가, 복지와 관련한 논쟁들, 환경과 고용의 관계, 대안적 화폐의 문제, 지역 화폐의 가능성 등을 더 심도 있게 다뤘어야 했다. 또한, 비록 탈고가 거의 다 되었던 시점이긴 하지만,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 사고가 난 이후에는 핵발전을 둘러싼 이익 집단의 형성과 사회적 영향력, 핵발전 기술의 안전성, 방사성 폐기물 관리 정책의 문제점, 우리나라 반핵 운동의 역사 등을 참고 자료로라도 더 추가했어야 하지 않았나 반성해본다. 친절하게 생태주의의 여러 갈래들을 소개해준 미덕은 있었지만, 모두 비슷한 비중으로 다룬 것 같아 다소 밋밋한 교과서처럼 되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든다.

직접 행동으로 지역 주민의 권리와 환경을 지켜낸 ‘러브 커낼’ 학부모들과 ‘우타르 프라데시 주’의 여성들.

책이 출간되자 함께 생태주의를 공부하던 후배들이 책의 분류법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일반적인 분류법과 다른 점이 있고, 특정 저자들이 과연 그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저자인지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여러 가지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분류를 한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짧은 기간이나마 지도 교수였던 존 드라이젝John Dryzek 교수의 분류법과 가장 유사하게 되었다. 배운 도둑질이 어디 가랴……. 어쨌든 드라이젝 교수에게 많은 빚을 진 책이 되고 말았다. 이 부채감 때문인가? 이번에는 미진했던 부분을 보완한 좀 더 학구적이면서 실천적인 책을 다시 써야 한다는 생각이,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감정을 밀어내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이 글은 비타 악티바 개념사 시리즈 24권 <생태주의> 저자 이상헌 선생님이 써주신 글입니다. 책에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들을 해주셨어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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