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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말하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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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말하다

책세상 2012.02.24 16:53
자유의 노스탤지어
ㅡ루소전집을 펴내며
이충훈

“자연으로 돌아가라.” 흔히들 장 자크 루소의 사상을 이 한마디로 요약한다. 애초에 스위스의 작은 도시 제네바에서 시계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루소에게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크고 번성했던 파리의 삶과 풍속은 천성적으로 거부감이 들만도 했다. 루소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대도시에 한데 모여 살아가고, 그들을 지배하는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만들어낸 부도 아니면서 이를 사치와 낭비로 탕진했다. 본 모습을 가면 뒤로 감추고 마음과는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과는 같이 살 수 없었다. 그의 조국 제네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허영심을 모르는 순박한 제네바 사람들은 옛 풍습을 지키며 화합하며 살아갔다. 그러니 대도시를 떠나, 그곳의 정치, 경제, 풍속, 언어, 문화, 예술을 떠나, 보다 자연에 가까운 곳에서 마음속 본성이 일러주는 대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앙리 루소, <꿈>
_"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진정 루소의 꿈이었을까?

그러나 루소가 가진 생각이 단지 그뿐이었다면 그가 그토록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가 태어난 지 300년을 맞는 오늘날에도 루소는 여전히 새롭게 해석되며, 연구자들의 연구 방식과 관점에 따라 그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모든 천재들의 작품이 그렇듯, 루소의 사상과 문학 역시 어떤 단일한 체계나 이론으로 환원시키기에는 너무도 풍부하고 폭이 넓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이들은 루소를 자유와 평등을 옹호한 사상가로 보면서 다가올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지주로 삼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근본적 정치 개혁 및 체제 변혁의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는 점을 내세워 앞의 입장을 반박하기도 한다. 루소가 성취한 문학예술에 대해서도 그를 당대 독자에게 새로운 감수성을 제시한 19세기 낭만주의의 선구자로 보는 입장이 있다면, 문체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과장과 역설로 일관했던 궤변의 작가로 낮춰 보는 입장도 있다. 더욱이 루소의 자서전이 18세기 말에 비로소 등장한 ‘개인’의 이념에 문학적·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그의 자서전 문학을 저자의 신경병리학적 질환의 결과물로 읽는 입장도 적지 않다. 정직과 불복종을 신념으로 삼은 혁명가의 모델로부터, 노출증, 나르시시즘, 피해망상증이 있었다는 입장은 그래도 점잖은 편에 속하고 정신분열증까지 앓았던 정신병 환자로 보는 입장까지 루소에 대한 동시대 및 이후 독자의 판단과 평가는 극에서 극을 달린다.

루소

과연 어떤 모습이 진정한 루소일까? 불평등한 사회의 기원이 소유제도에 있음을 갈파하고 사회구성원의 전적인 양도만이 평등한 사회의 기초라고 주장한 사회개혁가 루소와,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에 대해 중상모략을 일삼고 자신의 원고마저 빼앗아 훼손하고 없애버리려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불안에 떠는 루소 중에 어느 쪽이 그의 본모습에 가까운가? 사람들은 모두 선하게 태어났고 누구나 마음속에서 자연이 일러주는 도덕 명령을 들을 때 자기에게 부여된 의무를 수행하고, 타인을 배려하고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가르쳐주는 교육가 루소와, 아이 다섯을 고아원에 버리고 극심한 여성 혐오증이 있었고 계급 갈등과 증오를 부추겼다는 평가를 받는 루소 중에 어느 쪽이 진짜 루소인가?

다양한 루소가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정치 사상가, 철학자, 소설가, 교육이론가, 음악가, 극작가였다. 그가 다룬 분야가 너무 다양하고 폭이 넓기에 각 분야에서 제시된 이론과 입장이 상충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그의 사상과 저작을 성실히 이해하기에 부족하다. 또한 같은 분야에서도 그가 어느 저작에서는 이런 말을 하고 다른 저작에서는 저런 말을 한다는 점을 부각하여 그를 모순의 작가라고 섣불리 규정을 하는 것도 그를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바로 이런 까닭에 루소는 오랫동안 오해를 받았고 완전히 이해되지 못했고 미친놈 취급까지 당했다. 수많은 급진적 이론에서 루소는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한편 보수적이고 반혁명적이고, 교조적인 한편 수정주의적이기도 하고, 보편적 인류애를 선언하는 한편 이기적이고 당파적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또 다른 루소의 얼굴

그렇다면 이렇게 다양한 루소의 얼굴을, 그의 입장을 하나로 해석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실마리는 없을까? 루소가 아끼고 따랐던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 원리를 찾을 수는 없을까? 적어도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그 원리가 될 수 없을뿐더러 루소에 대한 수많은 오해가 여기서 나왔음이 분명하다. 사람들의 사회를 떠나 원시의 자연으로 돌아가면 잃었던 행복을 되찾을 수 있을까? 루소는 분명히 파리 사교계를 비난하고, 대도시의 도덕과 풍속을 비판하고, 그곳의 옷을 벗고 전원에 가까운 은둔지에서 살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도시를 떠난 적이 있던가? 소위 타락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한 번이라도 결정적으로 끊은 적이 있던가? 루소는 왜 그들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는가? 그 역시 “자연으로 돌아갈” 채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사실 루소는 “자연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말했다. 마치 최초의 인간이 낙원에서 추방된 뒤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운명이듯이, 태어나면서 이미 사회에 속하고 그곳에서 살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은 설령 순수한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대도 결코 그럴 수 없다. 낙원의 문은 이미 닫혔고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은 너무 멀다. 이제 사람들은 그 영원한 낙원을 잊고, 서로 오해하고 증오하고 다른 이를 부당하게 박해하고 또 다른 이가 가진 것을 탐욕스레 빼앗으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젊은 루소는 거짓과 허영의 외관을 벗고 마음과 마음이 서로 흉금을 터놓고 만날 수 있는 관계를 창안하고자 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고스란히 알 수 있는가? 다른 이들은 내 선한 마음을 어떻게 오해하지 않고 느낄 수 있는가? 사람들이 편의를 위해 만든 제도와 언어를 거치지 않고, 마음과 마음 사이에 놓인 가장 짧은 길로 바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 가장 짧은 길이란, 만인이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고 전혀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 다른 이들 역시 감출 것도 숨길 것도 없이 맨 얼굴 맨 마음으로 제게 다가오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 사회의 구성원이 서로 결속하기 위해 임의적인 제도나 법률, 강력한 국가 기구가 필요할까? 루소는 그런 것들은 사람들을 결속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멀리 떼어놓는다고 생각한다.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언어가 필요할까? 말없이 교환하는 눈빛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흐르는 진심어린 눈물이야말로 사랑의 감동을 배가시키는 것은 아닐까? 루소가 꿈꾼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이 바로 이랬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충고를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루소를 오해하고 모함하고 박해했다. 루소는 자기를 믿지 않고 자기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는 오해와 비난에 맞서 변명하고 항변하기보다 실제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았는지 세세한 일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사람들에게 들려준다면 그들이 비로소 진정한 자기 모습을 이해하고, 혹시 잘못이 있었다면 용서하고, 같은 마음이었다면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렇게 루소가 마음을 열고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몇 가지 사소한 잘못은 있었어도, 마음속 깊은 곳의 선한 본성은 그 어떤 준엄한 시선 앞에 선대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할 때, 이런 고백은 문학사에서 전례가 없었다. 그는 귀족도 아니고 배움도 적었다. 그가 정치를 했던가? 전쟁에 나가 공을 세웠던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학문 체계를 세우고 놀라운 발명이라도 했던가? 그의 삶이 파란만장한 모험과 역경으로 점철되기라도 했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제네바의 시민을 자처하는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가 마음을 깊이 울리고 재미를 주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왼쪽부터 루소가 쓴 에밀, 고백, 대화

그것은 루소가 고독을 홀로 견디며 어떤 제도나 사상에 얽매이거나 편향되는 일 없이 꿋꿋하게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살아갔기 때문이다. 음모와 권모술수가 널리 통하는 세상에서 신념 하나로 혼자 싸웠고, 학문과 예술도 유행과 평범한 취향에 좌우되는 세상에서 후원자 하나 없이 오로지 자기 붓 하나로 궁핍한 삶을 스스로 견뎠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의 삶과 글로써 고관대작에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자기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 보편적 감동을 줄 수 있었던 최초의 작가가 바로 루소이다.

따라서 루소를 그가 마음에 품은 뜻 그대로 이해하려면, 일견 모순되기도 해 보이는 그의 사상을 편견 없이 새겨보려면 그의 작품의 일부만을 읽고 서둘러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까지 루소에게 내려진 모든 의견들을 잠시 잊고, 그가 실제로 했던 말에 차분히 귀 기울여 본다면, 몰이해와 박해를 감수하면서도 타협이라고는 모르고 그가 지켰던 보편 인류에 대한 사랑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탄생 300주년을 맞아 ‘책세상 루소전집’이 완간되면 한국의 루소 연구에 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루소에게 있었던 모든 오해의 기원은 그의 주요 저작 일부만으로 이해되었고 평가받았던 데 있었다. 이제 그의 문학과 사상의 전모가 소개되면서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루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면 한국의 독자로서는 큰 행운일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루소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이 글은 루소전집의 역자이신 이충훈 선생님께서 써주신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

필자 소개 | 이충훈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강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을 공부했다. 그 뒤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제4대학에서 <단순성과 구성 : 루소와 디드로의 언어와 음악론 연구>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서강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D.A.F. 사드의《규방철학》,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회색 노트》, 마르틴 라퐁의《지구를 구하자》, 앙드레 지드의《좁은 문》등이 있다. 루소전집 13《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 프랑스 음악에 관한 편지 외 / 식물학에 관한 편지 외》를 번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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