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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는 나의 책,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 후일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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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는 나의 책,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 후일담

책세상 2012.04.12 18:02
ㅡ나의 책을 말한다

저자 김도환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서연문답》
. 이 책의 처음 제목은 《달과 거문고》였습니다. 이미 이 책을 읽으셨다면 이 제목이 어떤 의미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달은 만천명월주인옹, 곧 정조를 의미하는 것이고 거문고는 홍대용의 상징이라는 것을 말이죠.

책이 출간되고 나서 책을 훑어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책은 홍대용의 《계방일기》가 그 중심에 있습니다. 홍대용의 눈으로 바라본 정조와 서연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제목이 《홍대용과 정조》여야 했던 것은 아닐까요? 어째서 아무런 의문도 가지지 않은 채 책 제목에 정조를 앞세우게 된 것일까요? 별다른 고민도 없이 그렇게 결정해버린 제 머릿속 생각이 스스로 궁금해져 저 자신에게 질문을 해대기 시작했습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정조가 더 유명하니까 앞에 내세운 것 같기도 하고, 임금이니까 우대한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이유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 한동안 고민을 계속했겠지만 그 진짜 이유는 이미 책 속에 있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정조는 물이고 홍대용은 물고기였습니다. 정조가 달이라면 홍대용은 거문고였습니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헤엄칠 데가 없고 거문고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울지 않습니다. 홍대용이 세상에 쓰이고 쓰이지 않고는 전적으로 임금인 정조에게 달린 일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이다 보니 결정권자인 정조가 앞에 나왔던 것 같습니다.

책에도 적었듯이 박지원은 홍대용이 죽자 그를 위한 묘지명에 이렇게 썼습니다.

세상에서 홍대용을 흠모하는 사람들은, 그가 일찌감치 스스로 과거를 그만두어 명예와 이익에 뜻을 끊고 한가로이 앉아 향을 사르고 거문고와 비파를 타며 세속 밖에서 놀고자 하였던 것만 알 뿐이다. 사람들은, 그가 세상 많은 사물의 이치를 종합하고 정리하여 나라 살림을 맡거나 먼 곳에 사신으로 갈 만한 사람이었고, 나라를 지킬 기이한 책략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알지 못한다.

이 글은 이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홍대용이 이만한 크기의 사람인 줄만 알 뿐, 그보다 훨씬 더 큰 사람이었음을 알지 못한다.’ 이 말을 곱씹어보면 홍대용의 죽음 앞에서 그를 알아주지 않은 세상에 대한 박지원의 깊고도 깊은 원망이 느껴집니다. 여러분도 느껴지시나요? 저만 너무 예민한 건가요?

중국 선비 엄성이 그려준 홍대용 초상

“나라의 살림을 맡을 사람”, “먼 곳에 사신으로 보낼 만한 사람”, “나라를 지킬 기이한 책략을 가진 사람”
이라는 표현은 홍대용을 대체 얼마만 한 크기의 인물로 보았기에 가능했던 것일까요? 이 세 가지 모두에 해당하는 인물이란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요? 주나라 무왕이 등용한 강태공, 한나라 고조 유방이 등용한 장량이나 소하, 삼국시대 촉한의 선주 유비가 등용한 제갈량 같은 사람들이라야 감당할만한 임무가 아닐까요? 이 사람들은 모두 각각의 임금들이 애써 초빙한 인물들입니다. 그렇다면 박지원의 원망은 임금 정조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은 “그럴 것이다”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 고민 없이 정조가 앞에 나온 것이겠습니다.

책을 쓰는 과정에서 정작 고민이 되었던 것은 책의 포지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처음 시작은 《계방일기》의 번역이었습니다. 저야 어찌나 재미있던지 밤을 새우며 읽었고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가 느껴졌지만 전공자가 아니라면 쉽게 읽기 어렵겠다는 것은 명백했습니다. 그래서 각주를 달기 시작했습니다. 몇 쪽 지나지 않아 본문보다 각주가 더 길어졌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각주를 본문으로 올려 대화 중간중간에 제가 끼어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소설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는 흐름이 끊겨 읽기 나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쓰기도 나빴으니까요.

이즈음에서 이 책을 대중서로 만들 것인지 학술서로 만들 것인지에 대한 결정이 필요했습니다. 이 고민은 원고를 마칠 때까지 확실한 결론이 없었습니다. 어느 부분은 대중을 의식하면서 썼고 어떤 부분은 전공자들을 의식하면서 썼습니다. 그 결과 대중서와 학술서 중간쯤 가는 애매한 포지션의 원고가 탄생했습니다. 잘 되면 대중서와 학술서 양쪽 모두를 만족시킬 수도 있었지만 잘못되면 양쪽 모두에서 실패할 염려도 없지 않았습니다. 원고를 받아 쥔 책세상 편집부에서 이 책을 대중서 쪽으로 좀 더 끌어 당겨준 덕분에 저로서도 꽤 만족스러운 책이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이 책을 대중들이 읽기에 그리 나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학술서로서의 가치도 가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주장과 의견도 담고 있고 홍대용에 관해 처음 공개되는 사실들도 몇 가지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예를 들면 홍지(弘之)는 홍대용의 호가 아니라 자(字)라는 것, 〈여인서 이수〉라는 편지글의 수신자는 김종후이고 두 사람은 심각한 논쟁 이후에도 편지를 주고받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것은 꽤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 밖에 홍대용의 주변 인물에 관한 사항들이 그렇습니다. 정조 즉위 이후 예빈시 주부, 사헌부 감찰, 의빈부 도사를 지냈지만 실제 맡은 일은 혼전도감 낭청, 수리도감 낭청 일이었다는 것도 처음 밝힌 것입니다.(《영조빈전도감의궤》(奎 13584의 2) 에 보면 (이방낭청인) 예빈시 주부 홍대용이 병신년(1776) 4월 29일부터 임금의 명령에 따라 일을 보기 시작했고 6월 18일부터 7월 28일까지 삼방낭청의 일도 겸하였다는 내용과 사헌부 감찰 홍대용이 병신년(1776) 4월 29일부터 7월 28일까지 근무하였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원고에는 있었지만 책에는 빠진 사실을 하나 더 밝히자면, 남인 실학자로 성호 이익의 수제자이자 《동사강목》의 저자인 순암 안정복은 짧은 시간이나마 계방에서 홍대용과 함께 근무하기도 하였습니다. 더 이상 자료가 없어 둘의 관계를 추측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둘이 아는 사이였다는 것은 확실하고 그렇다면 홍대용이 《동사강목》이나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과 같은 책의 존재를 알고 있었거나 읽었을 가능성도 추측해볼 수 있겠습니다. 스승 김원행의 아들이자 6촌 형인 김이안도 이때 함께 근무했습니다. 정조가 즉위할 때쯤의 춘방과 계방은 그 인원 구성이 상당히 화려했던 것입니다. 정조의 용인술이 다시 한번 안타까워지는 대목입니다.

이 책의 중심이 《계방일기》이다 보니 홍대용의 다른 중요한 저술에 대해 많이 언급하지 못한 것은 꽤 아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공자들이 홍대용의 저작 가운데 가장 주목하는 것은 역시 《의산문답》입니다. 지구자전설이나 무한우주론, 화이일야론, 역외춘추론 등은 모두 《의산문답》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홍대용 사상의 핵심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중에 이미 여러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 봅니다.

읽는 재미로 치자면 《건정동필담》이 단연 최고입니다. 홍대용이 북경에서 만난 세 선비와 필담한 내용입니다. 《계방일기》, 《의산문답》과 마찬가지로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같은 수법으로 쓴 것입니다.

다큐멘터리 수법은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생생한 현장감을 전달할 수 있지만 읽는 사람에게 큰 착각을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치 있었던 모든 일인 듯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홍대용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필담한 자료의 절반 이상을 이 대화에 참여하였던 김재행이라는 친구가 가져가 버렸고 따로 정리하지도 않아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건정동필담》은 실제 대화의 절반 이하인 것입니다.

이 《건정동필담》이야말로 박제가의 말대로, “밥 먹으면서 숟가락질을 잊고 세숫대야를 앞에 놓고 씻기를 잊었다”고 할 만큼 재미있습니다. 해설이 있다면 훨씬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글입니다. 《국역 담헌서》에 실려 있으니 ‘한국고전종합DB’에서 웹으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고전번역총서’에서 ‘담헌서’를 찾아가서 외집 권 2와 권 3을 보시면 됩니다. 한글로 적은 연행록인 《을병연행록》에도 들어가 있지만 이 책은 날짜별로 정리된 것이어서 《필담》만 읽으려는 분들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말이 쉬워 필담이지 당사자들에게는 꽤 고역이었을 겁니다. 옆 사람과 모든 이야기를 메모로 주고받는다고 한번 상상해보세요.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게다가 한문으로 해야 하니까 말이죠. 자기 생각을 즉각 한문으로 적어 내려갈 수 있는 사람이 조선 시대에도 그리 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인이 배운 한문은 한문 가운데에서도 경전에 쓰인 고문일 테니 그것을 읽고 고문으로 다시 답하는 청나라 선비들도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쓰는 말이 달라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청나라 선비 반정균이 홍대용에게 《한예자원》이라는 책을 선물하려 하였습니다. 《한예자원》은 중국 한나라 때의 예서라는 글씨체를 따로 모은 서예와 관련된 책입니다. 반정균은 이 책이 혹시 조선에서도 흔한 것이면 선물로서 적당하지 않을까 싶었던지 조선에도 이 책이 있는지 물어왔고 홍대용은 조선에도 더러 있는 책이라며 이렇게 답했습니다.

홍대용_  정으로 주고 정으로 받는 것인데 있고 없고 필요하고 필요하지 않고를 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글씨를 못 쓰니 중의 머리빗과 같지만 부친께서는 예서를 좋아하시니 돌아가 부친께 드리겠습니다.

반정균과 엄성 두 한족 선비는 ‘중의 머리빗’이라는 말의 의미를 몰랐던지 무슨 뜻인지 물었습니다. 이에 홍대용이 유창하지 못한 중국어로 답하였습니다.

홍대용_ 중은 머리카락이 없으니 빗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즉 ‘중의 머리빗’이란 필요 없는 물건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모두 웃으며 자기 머리를 가리키더니, “우리도 번쩍번쩍합니다”고 하였답니다. 한족이지만 변발을 하였으니 머리 모양이 중과 별반 다를 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홍대용과 사귀었던 이 두 사람은 훗날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반정균은 훗날 과거에 합격하여 상당한 관직에 오르게 됩니다. 홍대용이 북경에 다녀온 것이 1765년의 일이었고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1778년 박제가와 이덕무가 홍대용의 소개장을 들고 북경에 가서 반정균을 찾습니다. 반정균을 통해 이들은 청나라 인사들과 교류를 넓히게 되고 북학의 바람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또 다른 친구인 엄성은 홍대용의 권고를 받아들여 과거를 포기하고 낙향합니다. 홍대용이 오랑캐의 과거 보는 일을 탐탁지 않게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엄성이 과거에 낙방하였고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겠다는 편지를 받고 홍대용은 축하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본래 엄성은 양명학을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엄성은 홍대용의 설득으로 다시 주자학으로 돌아왔습니다. 엄성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에 걸려 죽으면서 홍대용이 주고 간 먹과 향을 품에 안고 죽었습니다.

간혹 홍대용을 양명학을 한 것처럼 묘사한 글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오해이고 홍대용에 대한 실례입니다. 홍대용이 양명학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그는 분명한 주자학자입니다. 엄성같이 멀쩡한 양명학자를 주자학자로 만들어놓고 자신은 양명학을 한다면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또 홍대용이 끝내 과거를 보지 않았던 데에도 엄성의 일이 작용했을 법합니다. 친구는 과거를 포기하게 해놓고 자기는 과거를 보아 합격한다면 역시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느끼셨겠지만 홍대용과 청나라 선비와의 사귐에서는 홍대용이 우위에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을 감복시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3년 뒤의 박제가나 이덕무는 어쩐지 청나라 사람들에 대해 저자세입니다. 아마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하였을 것입니다. 홍대용이 그들에게 스승이나 대선배 격이니 그 친구인 반정균 등에게 자세를 낮추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그들이 북경에 갔을 때 반정균은 이미 청나라 관료였고 그들은 관직이 없었던 것도 저자세의 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이 서자 출신이라는 것도 그런 자세를 갖게 하는 데 한몫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북경에 다녀온 박제가와 이덕무가 여기저기 자랑을 하고 다니자 박지원도 1년 뒤 북경을 방문합니다. 운이 없었던지 박지원은 홍대용의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돌아와서도 청나라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지 않았습니다. 박지원의 북경 여행은 거의 전적으로 홍대용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적극성 면에서 홍대용과 다릅니다. 또 그의 사상 가운데 상당 부분은 홍대용에게서 영향받은 것입니다.

박지원이 홍국영을 피해 연암협에 숨었을 때 홍대용은 박지원에게 돈 수만 전과 소 두 마리, 종이 따위를 보냈습니다. 책을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책을 불살라 세상을 편안히 해야 한다던 홍대용이 박지원에게만큼은 오히려 책을 쓰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가 어떤 내용의 책을 쓸지 익히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만큼 이 두 사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홍대용의 죽음 앞에서 박지원이 분노에 가까운 원망을 드러낸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디에서인가 이 책의 편집자가 이런 말을 했더군요.(편집자 후기 글 보러 가기 -편집자 주) 정확한 인용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홍대용이 아니었다면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취지였습니다. 이 말에서 “없었을지도 모른다”를 “없었다”로 고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사족을 한 마디 더 달자면 이 책에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진 것들이 꽤 있습니다. 정조와 홍대용, 그들의 대화를 곱씹으며 읽어 보시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신다면 서로 다른 생각을 하실 수도 있고 서로 다른 생각을 그들처럼 멋들어지게 토론해보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필자 김도환
1984년 한양대 사학과에 입학해 학사, 석사 과정을 마치고 〈홍대용 사상의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양대 사학과 강사, 한양대 한국문화연구소(현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서울대 규장각 선임연구원을 거치면서 조선 후기 사상사를 연구했다. 그에게 있어 홍대용과의 만남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과도 같았다. 1980년대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 한국 사회의 지향점을 고민하다가 대학원에 진학해 조선 후기 사회경제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조선 후기 사회경제사를 공부하며 읽게 된 농서農書 가운데는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 사상가들의 것이 많았다. 북학 사상에 대한 관심이 그들 중 가장 연장자이며 북학의 문을 연 인물인 홍대용에게 옮겨 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글 써주신 김도환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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