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책세상 블로그

누군가 나를 욕한다면? 알지 못하거나, 제대로 알지 않았거나 본문

책세상 책읽기/오늘의 고전 읽기

누군가 나를 욕한다면? 알지 못하거나, 제대로 알지 않았거나

책세상 2012. 5. 30. 11:13
루소가 말하는 루소 사용설명서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ㅡ대화>

활자유랑자 금정연



루소, 가장 좋아했다는 초상화

언젠가 루소는 이렇게 말했다. “오, 인간이여! 그대의 존재를 그대 안에 가두면 그대는 더 이상 비참해지지 않으리라. 자연이 존재의 사슬 속에서 그대에게 할당한 곳에 머물라.”[각주:1]  그럴듯한 말이다. 그 자신, 거대한 에고를 끝내 가둘 수 없어 끊임없는 비참에 시달려야 했던 인물이 하는 말씀이라면 더더욱.

그로부터 2세기 후, 블랑쇼는 이렇게 쓴다. “장-자크 루소가 생전에 자신이 그렇게 믿었던 만큼 박해받았는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사후에 그에 대한 박해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며, 적의로 가득 찬 정념을 초래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술 더 떠서 겉으로 보기에 이성적인 사람들까지도 그를 미워하고, 그의 모습을 왜곡시키기 위해 기를 쓰며 비난을 퍼붓고 있다.”[각주:2]  이를테면 이런 비난들.

“루소는 비록 개인적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허영심이 강하고 성미가 급하고 또 다투기를 잘했으나, 온 인류에 대한 감상적 사랑을 품고 있었다.” (스털링 P. 램프레히트)[각주:3]

“그는 이성을 불신했던 까닭에 한 번도 진실되고 신뢰할 만한 감정과 헛되고 공상적이고 혹은 악의에 찬 감정을 구별하는 기준을 시사조차 할 수 없었다.” (역시, 스털링 P. 램프레히트)[각주:4]

“그가 일상의 덕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는 증거는 매우 많다. 그렇지만 그는 기본적인 행동에 전혀 방해를 주지 않는, 가장 친한 친구들을 향한 따뜻한 가슴이 있다고 언제나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리곤 했다.” (버틀런드 러셀)[각주:5]

“늘 엄마를 찾은 마조히스트.” (다니엘 부어스틴)[각주:6]

“그는 모든 친구를 적으로 만들었고, 만년에는 거의 미쳐 있었다. 온갖 종류의 별스러운 질병에 시달렸으며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형태의 신경증을 앓았다.” (J. 크리스토퍼 헤럴드)[각주:7]

루소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그의 시대에도 그를 향한 비난은 결코 부족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기 몇 가지 증거가 있다.

“그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내 곁에는 저주받은 영혼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다시 보고 싶지 않다. 그는 나로 하여금 악마와 지옥이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드니 디드로)[각주:8]

“내 생각에 그는 최악의 인간이야. 서너 나라가 그를 추방했지. 이 나라가 그를 보호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야.” (‘닥터’ 새뮤얼 존슨)[각주:9]

“민회를 지지하는 정신 이상의 소크라테스.” (에드먼드 버크)[각주:10]

“그는 허영으로 가득한 자만심 이외에는 자기 가슴에 영향을 미치거나 자신의 오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원칙도 환대하지 않았다.” (다시, 에드먼드 버크)[각주:11]

“그는 일생 동안 오로지 느낌에만 충실했다. 이 점에 관한 한 이전의 어떤 사례도 능가할 정도로 고양되어 있다. 그런데 그의 감수성은 그에게 쾌락보다는 오히려 더 큰 고통을 안겨준다. 그는 자신의 옷뿐만 아니라 피부까지도 벗어버린 채, 사납게 휘몰아치는 폭풍우에 맞서 싸우는 상황에 내몰린 사람 같다”[각주:12]라는 데이비드 흄의 평가는 러셀의 말대로 공정하며 또한 ‘가장 친절한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흄이 세상을 떠난 후(동시에 루소가 세상을 뜨기 바로 직전) 애덤 스미스에 의해 출간된 흄의 자전적 에세이를 루소가 좋아했을 것 같지는 않다. 10여 쪽에 불과한 짧은 글을 흄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사람이 자신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허영심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짧게 말하려고 한다.”[각주:13]  (물론 여기서 ‘자신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이 다름 아닌 루소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심지어 그의 성격은 다른 이의 덕성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기도 했다. 마치 칸트의 산책이 동네 주민들의 시계가 되었던 것처럼.

“흄은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일례로 그는 성격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철학자 루소에게 최선을 다해 호의를 베풀었다.” (앤서니 케니)[각주:14]

자, 상황이 이러하니 이제 막 외국에서 돌아와 세상물정 모르던 ‘루소’ 씨가 ‘프랑스인’의 입을 통해 ‘장 자크’의 추잡한 이면을 듣게 되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우리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는 말한다.

루소 : 나는 방금 너무나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놀라워요, 정말 놀라워요. 그럴 수가! 얼마나 가증스러운 사람인지! 그자는 내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어요! 나는 그를 미워할 겁니다![각주:15]

루소의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ㅡ대화>는 바로 이렇게 시작한다.

*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ㅡ대화>(이하 <대화>로 표기)는 루소의 말년에 쓰인 ‘자서전 삼부작’의 한 권으로, <고백>과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의 사이에 놓인 작품이다. 일반적인 회상록 형식으로 쓰인 <고백>이나 내적 일기 형식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과는 달리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순진한 독자 ‘루소’ 씨와 소문에 빠른 ‘프랑스인’이 악명 높은 작가 ‘장 자크(이하 J.J.로 표기)’의 추악한 진실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다. 물론 그들을 연기하는 것은 장-자크 루소 자신이다. 일종의 일인극인 셈이다. 회상과 일기로도 모자라 대화 형식까지 동원하다니. 과연 흄의 말마따나 그는 허영심 가득한 인간이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의문은 남는다. 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굳이 대화라는 형식을 필요했을까, 하는 의문이.

1712년 주네브에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난 루소의 인생은 파란만장 그 자체다. 어머니는 그를 낳던 도중 사망했고, 가출한 형은 평생 돌아오지 않았으며, 그의 아버지 역시 그를 떠났다. 그의 나이 열 살 때의 일이었다.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목사에게 맡겨진 루소는 목사의 여동생에게 체벌을 당하며 성적쾌감을 맛보았고, 마조히즘적인 쾌감을 향한 욕망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이후 목사관을 나온 그는 시계 조각공의 도제를 거쳐, 한 귀부인의 집사이자 조수, 양자이자 정부라는 임상수 감독의 영화에나 나올 법한 역할을 수행하는가 하면, 악보도 읽을 줄 모르면서 어린 소녀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일을 맡기도 한다. 예루살렘에서 온 가짜 수도원장과 함께 헌금을 위한 설교를 하는 한편, 함께 여행을 하던 친구가 간질 발작을 일으키자 친구는 내버려둔 채 사람들이 던져준 동전을 열심히 챙긴 것도 그였다.

새로운 악보표기법을 만들어 돈을 벌 계획을 세우기도 했던 루소는 다양한 일거리를 전전하는 틈틈이 기상천외한 연애사건에 휘말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타고난 매력과 재능을 바탕으로, 간단히 말해 어느 귀부인의 도움으로, 베네치아 주재 프랑스 대사의 개인비서 자리를 꿰차기도 한다. 하지만 이 또한 평생직장은 아니었는데, 임금 문제로 대사와 한바탕 다툰 후 때려치운 것이다.

러셀

이룬 것도 없이 나이만 먹은 30대의 루소는 파리로 돌아와 평생의 동반자를 만난다. 테레즈 르바쇠르라는 이름의 하녀였다. 러셀에 따르면 “흉한 외모를 가진 데다 무식하기까지 했”던 그녀의 어떤 점에 루소가 매력을 느꼈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러셀 또한 “재정적인 면에서나 지적인 면에서 그녀보다 우월하다는 확신과 그녀가 자신에게 완전히 의존한다는 느낌을 즐겼을”[각주:16]  것이라는 다소 피상적인 추측을 제시할 뿐이다. 물론 루소에겐 그녀를 위해 다른 여자들과의 애정 관계를 청산할 마음이 없었고, 행동 또한 그러했다는 ‘팩트’를 지적하는 일도 잊지 않는다.

반면 해럴드는 좀 더 심층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그는 “자신이 간절히 원하고 열렬히 사랑하는 여성에 대해서만 성적 불능이었으며, 당연히 테레즈는 그런 여성이 아니었다”[각주:17]는 사실에 주목한다. 앞서 그는 목사관의 생활을 통해 함양된 루소의 성적취향을 언급하며 “수줍어하는 성격 때문에 자신이 품었던 가장 큰 욕망(사도마조히즘 플레이)을 여성에게 요구할 수는 없었다”고 덧붙였는데, 결국 테레즈 앞에서는 루소가 수줍음을 느끼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돌려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분석이 옳다면 러셀의 말과는 반대로 재정적인 면에서나 지적인 면에서 그녀보다 우월한 루소 자신이 그녀에게 완전히 지배당한다는 느낌을 즐긴 것이 된다. 물론 이는 심리학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일 것이다.

읽지도 쓰지도 못했던 그녀는 남은 평생 루소의 곁을 지키며 모두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루소의 고백(혹은 <고백>)에 의하면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으로 보내졌으며, 그 후로는 그들을 다시 보지 못했다. 아무려나, 아이가 있건 없건 가정을 꾸리는 일에는 돈이 필요한 법이다. 물론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국가 또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문제겠지만 일단 루소의 시대로 주제를 한정시키자. 당시 루소가 매달리고 있던 글쓰기와 악보 베끼기로는 생계를 꾸려나갈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그에게도 광명이 드리우기 시작했으니, 남은 그의 삶에 깊은 그늘을 드리울 강렬한 빛이었다. 38세가 되던 1749년 여름, 백과전서파의 계몽철학자들과 친분을 나누던 그는 감옥에 있던 디드로를 면회하러 가는 도중 우연히 한 잡지에 실린 디종 아카데미의 논문 공모전 공고를 보게 된다. ‘(르네상스 이후) 학문과 예술의 부흥이 풍속의 순화에 기여했는가?’라는 주제였다. 그는 훗날 그 운명적인 순간을 이렇게 회상한다.

“그것은 읽는 순간 나는 갑작스러운 영감 같은 것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수천 개의 불빛이 내 영혼을 비추는 것만 같았습니다. 생생한 사상이 내게 떼 지어 밀려들었습니다. 힘차고도 당혹스럽게 그것은 나를 설명할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술에 취한 것 같은 현기증이 느껴졌습니다. 맥박이 고동쳤고 가슴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나는 더 이상 걸으면서 숨을 쉴 수가 없었으므로 길가에 있는 나무 아래 쓰러졌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반 시간 동안이나 흥분에 휩싸인 채 그대로 있었습니다. 다시 일어났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흘린 눈물로 윗도리 앞자락이 흠뻑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 [각주:18]

집으로 돌아온 그는 즉시 <학문예술론>이라 이름 붙인 논문에 착수한다. 다소 현학적인 공모 주제를 ‘예술과 학문은 도덕성과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켰는가?’라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바꾼 그는 (디드로의 조언을 따라) “아니. 아니. 아니. 잠깐, 그 부분은 생각 좀 해보고. 음… 역시 아니”라고 요약할 수 있을 부정적인 대답을 제출한다. 예술과 학문은 진보가 아닌 퇴보의 기념비일 뿐이고, 역사의 어느 장을 펼쳐 보아도 문화의 함양은 늘 도덕의 타락을 수반해 왔으며, 그에 반해 공허한 지식에 감염되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기들의 도덕을 통해 행복을 얻고 다른 사람들의 귀감이 될 수 있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각주:19] 그것은 물론 그가 남은 평생을 바쳐 끊임없이 주장하게 될 루소 사상의 서막이었다. 바야흐로 ‘자연인’ 루소의 존재를 선포하는 순간. 그는 특유의 (후대의 낭만주의자들이 그들의 ‘영혼’을 바쳐 추앙하게 될) 목소리로 세상을 향해, 아니 온 ‘우주’를 향해 외친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를 선조들의 계몽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행복을 증진할 유일한 자산인 소박함과 무구함과 가난으로 되돌려 주소서!”[각주:20]

*

<학문예술론>은 (당연히) 일등상을 받았고, 세상은 새로운 천재의 등장에 환호했다. 동시대 계몽철학자 엘비시우스의 표현에 의하면 ‘우연히 된 철학자(philosophe par hasard)’, 루소 자신의 표현에 따르자면 ‘실수로 된 철학자(philosophe par erreur)’가 일약 지성계의 슈퍼스타가 된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인류의 지성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게 될 문제작들을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에밀>, <사회계약론>과 같은 철학적인 저작들을 발표하는 것은 물론,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낭만적인 사랑을 그림으로써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한 서간체 소설 <신 엘로이즈>를 썼고,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했다. 물론 틈틈이 연애 사건을 벌이는 일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영광의 나날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모든 친구를 적으로 만들었다’는 후대의 평가처럼 그는 볼테르와 다투었고(그는 볼테르를 “불경스러운 나팔, 얍삽한 천재, 야비한 영혼”이라고 불렀으며, “만약 당신의 재주 이외에 내가 존경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해도, 그것은 나의 잘못은 아닙니다”라고 쓴 정중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각주:21]), 이내 디드로를 비롯한 백과전서파의 다른 계몽철학자들에게도 등을 돌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등을 돌렸다고 해야겠지만.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인간관계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에밀>에서 자연 종교의 원리들을 제시하며 가톨릭교와 개신교 정통파를 공격했던 그는, <사회계약론>을 통해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왕권신수설을 부인하며 명실상부한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두 책은 판금 조처되었고 심지어 불태워졌으며, 급기야 저자 루소에 대한 구속영장까지 발부되기에 이르렀다. “2500년 동안 전해내려 온 인간의 영혼관과 사회관을 폭파해 버린”[각주:22]  그에게 세상이 복수를 시작한 셈이다.

루소는 체포를 피해 스위스로 피신하지만,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문자 그대로) 돌팔매질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정처 없이 떠돌던 그는 1766년, 데이비드 흄의 초대를 받아들여 영국으로 떠난다. 영국에서는 모든 것이 잘 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얼마 동안은. 하지만 계속되는 당국의 박해와 몇 년 동안이나 이어진 도피생활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그의 심신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는 세상 전체가 자기를 모함하고 음해하는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망상(평자에 따라 피해망상, 추적망상, 박해강박, 편집증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는)에 사로잡혔고, 흄 또한 그들 편이라는 의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결국 흄과 결별한 그는 책을 출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프랑스로 돌아온다. 그리고 세상의 음모에 결연히 맞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로 마음먹는다. 영국으로 떠나기 전 이미 집필을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했던 <고백>을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이다. 세헤라자데의 이야기처럼 기나긴, ‘자서전 삼부작’의 시작이었다.

*

루소의 삶과 사상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자전적인 작품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견해가 일치하는 편이다. 서로 다른 세 명 저자들의 문단을 이어 붙여 <고백>을 설명하는 그럴듯한 소개문을 만들 수 있을 정도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루소는 <고백>에서 전례가 없을 만큼 진솔하게, 거의 노출증에 가까울 만큼 솔직하게 자신의 생애를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갈등과 내면적 고투, 열정적 감정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었고 끊임없이 방황하면서 극심한 불행에 시달렸으며 심각한 심리장애마저 있었던 한 인간의 삶이다.”[각주:23]

“루소는 비방자와 비판가들에 대항하여 자신의 인생을 정당화할 속셈으로 당황스러운 개인사를 고백하고 있다. 가령 자신에게 빈뇨증이 있었다는 사실, 자신이 물건을 훔쳐놓고 그것을 불쌍한 하녀에게 뒤집어씌운 사실, 자신의 아이들을 기아(棄兒) 병원에 내다버린 사실 등을 적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대중 앞에서 자신을 매도한 것은 하나의 전략에 불과하다. 그는 이렇게 묻고 있다. 하느님의 재판석 앞에 선다면, 독자들의 삶도 나(루소)보다 별반 나을 것이 있는가? <고백>은 본질적으로 자기 인생에 대한 변명이다.”[각주:24]

“그러나 그의 사후 출간된 <고백>은 그에 대한 오해를 더욱 증폭시켰을 뿐이다. 언제나 자기 자신의 최대 적이었고, 다른 사람들을 적으로 만드는 데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그는, 저작들이 널리 읽히면 읽힐수록 더 많은 적들에 의해 포위되었다. 루소의 비방자들은 <고백> 한 권만으로도 그를 공격할 병기로 가득 찬 무기고를 확보할 수 있었다.”[각주:25]

그렇다. 그는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터놓고 말함으로써 세간의 오해를 불식시키려 했고, 자신이 더없이 진솔한 인간이라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바닥까지 떨어진 명성을 회복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사람들은 그의 글에서 오직 악덕만을 찾았고, 루소의 악명은 더욱더 높아져만 갔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이 글에서 요약하고 있는 루소의 개인사 부분을 보라. 블랑쇼의 지적대로 그것은 “그의 모습을 왜곡시키기 위해 기를 쓰는” 후대인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서술이다. 나는 러셀과 J. 크리스토퍼 헤럴드의 서술을 참고했다. 그리고 그들은 루소의 <고백>을 참고했다.

해럴드는 루소를 가리켜 “적에 의한 희생자인 동시에 자기 폭로의 희생자”라고 쓴다. 루소 또한 그 사실을 알았다. 그는 <대화>의 등장인물 ‘루소’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그는 당신의 신사 분들이 회고록이라고 부르는 <고백>을 통해 그들에게 덜미를 잡히는 계기를 제공했고, 그들은 그것을 결코 놓치지 않았어요.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그 책을 읽어줬는데, 그것을 이해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더욱 없었습니다. 결국 그 독서는 사람들에게 그의 나약함과 가장 은밀한 잘못을 모두 알려주는 꼴이 되고 말았지요. (…) 괴물로 여겨질 정도로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이 왜곡된 것을 보면서, 자신에게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이 더 많다고 느끼던 그의 자의식이 그에게 용기를 준 것이지요.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여줄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은 아마 그 사람밖에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는 자기 영혼의 내면을 완전히 드러내고 <고백>을 제시함으로써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었던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해 아주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설명을 하면, 그 설명이 자신의 증언이 되어, 자기 고백이 진실한 것이고 근원도 밝혀지지 않은 채 널리 퍼져 있는 자신에 대한 끔찍하고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 잘못된 것임을 느끼게 해줄 거라고 믿었어요. (…) 그들은 그의 결점을 악덕으로, 그의 잘못을 죄악으로, 그의 젊은 날의 나약함을 성숙한 나이의 비열함으로 왜곡했습니다. 그의 영혼 속에 자리 잡은 사랑스럽고 좋은 본성의 결과를, 때때로 우스꽝스럽기도 한 결과를 변질시켰어요. 소심한 천성에 의해 억제된 열성적이고 독특한 기질에 불과한 것들이 그들의 수고로 지독히 변태적인 취향과 기분으로 바뀌었어요. J.J.에 대한 그들의 진행 방식과 내가 감지한 모습들을 통해, 마침내 나는 그들이 <고백>에서 그에게 불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찾아낸 후 <고백>을 헐뜯기 위해 그가 살았던 모든 장소에서 음모를 꾸미고 책동을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평생을 왜곡하고, <고백>을 거짓으로 보이게 하는 거짓말을 교묘하게 만들어내고, 그가 자신에게 불리한 고백을 한 것에서조차 솔직함이라는 장점을 없애기 위해서 말이에요.”[각주:26]

하지만 루소는 멈추지 않는다. 잘못은 명백했다. 진실한 영혼의 고백을 이해할 사람이 그의 시대에는 없었다는 사실. 이번에는 대화라는 형식을 이용하기로 한다. 그가 보기에 “대화는 찬반을 논하기에 가장 적절한 형식”[각주:27]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기꺼이 자기 자신을 분열시킨다. 순진한 독자 ‘루소’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루소를 박해하는 거대한 음모의 일원이 된 ‘프랑스인’, 그리고 가련한 희생양인 작가 ‘J.J.’라는 세 명의 인물로. “<고백>에서 독자에게 고백을 함으로써 독자들을 자신의 고백을 들어주는 사람인 동시에 심판자로 만들었던” 루소는, “<대화>에서는 독자에게서 심판자의 지위를 빼앗는다. 독자들이 아니라 루소 자신이 ‘J.J.’ 심판관이 되어 그를 어떤 방법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심판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각주:28]

*

<대화> 자필 원고

다시 <대화>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외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J.J.’의 열렬한 독자 ‘루소’ 씨는 우연히 만난 ‘프랑스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는다. 그가 그토록 탐독했던 위대한 저작들의 저자, 고귀한 영혼의 소유자인 ‘J.J.’가 형편없는 악당이라는 것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놀랐을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던 윤리교과서 속 성선설의 아이콘이 이런 인간이었다고? ‘루소’는 절규한다. “나는 방금 너무나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놀라워요, 정말 놀라워요. 그럴 수가! 얼마나 가증스러운 사람인지! 그자는 내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어요! 나는 그를 미워할 겁니다!”

하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은 그는, ‘프랑스인’에게 ‘J.J’가 행한 범죄의 증거를 제시할 것을 요청한다. 그의 저작에 감춰져 있는 독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 또 그의 작품이 표절이라면 누구의 작품을 어떻게 표절한 건지, 그가 치졸하고 더러운 범죄자라면 그 증거는 또 무엇인지. 그리고 그는 프랑스인에게 근거라고 할 만한 것들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그저 항간의 소문을, 고귀한 신사분들이 하시는 말씀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제 것처럼 떠벌이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J.J’의 저작을 읽지도 않았다. 고귀한 신사분들이 그것을 정신의 독약이라고 선포했으므로, 자신은 읽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다.

루소의 생각으로는 바로 그것이 핵심이었다. 자신의 저작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저자의 덕성을 흠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테니까. 누군가 자신을 욕한다면 그것은 읽지 않았거나,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일 테다. 볼테르와 디드로를 비롯한 그의 적들이 권세와 명성을 등에 업고 그를 음해하려는 목적으로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렸고, 그의 책을 읽지 않도록, 적어도 올바르게 읽지 않도록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전지구적인 음모다. 루소는 그렇게 생각했다. 당신은 웃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루소는 진지하다. 그는 <대화>를 통해 거대한 음모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한다. 모든 사람이 음모에 동참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저 몇 사람의 핵심인물로 족하다. 그럴듯한 말을 꾸미고 적당히 둘러대어 사람들에게 지침을 내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대상이 소문을 좋아하는 프랑스인이라면 더더욱. 음모는 교묘하다. 겉으로는 여전히 평화로운 세상이고, 누구도 나서서 루소에게 해를 가하진 않지만 그들은 그렇게 서서히 루소를 사회에서 고립시켜 고독 속에서 죽어가게 만드는 것이다. 누구도 그를 방문하지 않고, 그의 방문을 받아주지 않는다(단, 음흉한 목적이 있는 경우는 제외하고). 새로운 소식을 접하지 못하도록 신문을 모두 치웠으며, 어떤 책을 읽기 위해 서점에 가면 그 즉시 모든 마을에서 그가 찾는 책은 사라졌다. 정부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그때그때 지침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낭만적인 루소의 영혼이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망상이었다. 하지만 루소의 입장에서 망상에 빠진 것은 그를 제외한 세상이었다. 그리고 솔직한 ‘고백’이 악의적인 오독으로 더럽혀진 지금, 그는 ‘대화’를 통해 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한다. 거장의 풍모가 빛나는 지점이다. 물론 그는 낙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절망하지도 않는다. 그는 서문(‘이 글의 주제와 형식에 대하여’)의 마지막을 이렇게 쓴다.

“이 글을 손에 넣게 되어 읽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관대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으리라는 믿음이나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할 만큼 인류를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각주:29]

<대화>는 바로 그런 책이다.

*

총 3부, 번역본으로 400여 쪽에 이르는 기나긴 대화를 통해 ‘루소’는 ‘J.J.’의 애독자답게 차근차근 ‘프랑스인’을 설득해나간다. ‘프랑스인’으로 분한 루소는 스스로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는 모든 기발한 논리를 차용하고, 또 창조하며 ‘J.J.’를 비난하고 ‘루소’를 궁지로 몰아넣지만, ‘루소’는 지지 않고 어떤 작가의 저작을 읽지도 않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일임을,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포장을 해도 고귀한 신사분들의 음모는 옳지 않은 일임을 따지고 드는 것이다. 그는 세상의 오해에 맞서 ‘J.J.’의 사상을 변호하고, 올바른 독법을 제시하며, 나아가 그의 사상에 대한 전체적인 가이드를 제시한다. 결국 루소가 말하는 루소 사용설명서인 셈이다. 하지만 역시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거대한 음모에 대한 루소 자신의 편집증적 집착이다. 장점과 단점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태도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열정적인 목소리 또한 여전하다. 인간 정신의 수수께끼를 보여주는 텍스트.

“당신 스스로 수수께끼를 만들지 않는 한, 수수께끼는 없습니다. 그는 착하다기보다는 악의가 없는 사람이고, 건강하지만 나약한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덕을 숭배하지만 실천하지 못하고, 선행을 몹시 좋아하지만 행하지는 못하는 사람이지요. 그의 마음이 결코 죄에 가까이 간 적이 없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내 존재를 확신하듯 확신합니다. 증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요. 그의 도덕성에 대한 내 관찰을 요약하자면 그렇습니다. 나머지는 요약해서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내가 아는 다른 어떤 사람과도 비슷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 사람에 대해서만 따로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각주:30]

하지만 <대화>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그리 후하지 않다.

“그가 쓴 대화록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는 군데군데 이성적 섬광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암담해지는 그의 정신 상태를 드러내주는 비극적 증언이다.”[각주:31]

“<고백록>에서 보이는 기꺼이 엉덩이를 맞고자 했던 루소의 성적 마조히즘을 여기서 자세히 곱씹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루소가 파리 노트르담 성당의 제단에 바친, 자기 자신과의 기이한 대화집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역시 다루지 않을 것이다.”[각주:32]

인용문에서도 드러나듯, 그 부분에나마 주목한 책은 무척 적고, 대개는 언급조차 하지 않으며, 덕분에 나는 적지 않은 책을 뒤져야만 했다. 역자 또한 <대화>의 말미에 붙은 해설에서 이런 현실을 지적하며 서두를 뗀다.

“장-자크 루소의 사상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의 자서전적인 글들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었다. 기껏해야 그의 이론서가 쓰인 상황을 설명해주는 구절들을 인용하는 것에 불과했고, 자서전적인 작품을 더 많이 활용한다면 루소의 사상을 그의 인간적인 됨됨이에 비추어 해석하기 위한 경우가 고작이었다. 대체로 이런 접근은 루소의 개인적 혼란을 드러냄으로써 그의 이론서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할 때가 많았다. 자서전적인 작품의 이론적 의미를 체계적으로 다루고자 시도한 학자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고백>이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과 같이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자서전적인 작품들도 루소의 사상에 접근하려는 시각보다는 이를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간주하는 시각 아래 놓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 대화>에서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 대화>는 루소의 주요 저작들 중에서 가장 안 읽히고 연구되지 않은 작품으로, 최근까지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로 루소의 망상증에 대한 증거로 이 책에 관심을 보였다.”[각주:33]

이어 역자는 현재 프랑스에서는 기존의 평가를 넘어 <대화>의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며 중요성을 주목하는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루소의 삶과 더불어 사상 체계에 대한 포괄적인 시각을 제공해주는 책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을 망상증의 증거로 보는 시각을 반대한다.

“현대의 비평가들은 루소를 괴물보다는 정신 이상자로 특징짓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그의 작품에 대해 적대적이기보다는 다소 상냥한 어조를 취한다. 그러나 이 책의 ‘프랑스인’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루소 작품의 본 내용에서는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 개인에 관한 견해로 인해 그의 작품이 심오하고 진실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각주:34]

하지만 나는 그 우려에 공감할 수 없다. 나는 루소 연구자가 아니고,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루소 전공자는 아닐 것이다(혹시라도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이 ‘비전공자’의 글을 덮으시길). 대학시절 ‘근대 철학’ 수업을 수강하긴 했지만, 교재로 썼던 <서양근대철학>의 루소 부분에 이르기 전에 학기가 끝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적어도 나는, 이 긴 ‘대화’를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그게 나에게 가장 익숙한 독법이므로. 누구라도 <대화>를 읽은 사람은 느낄 수 있다. 자신이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한 비탄에 빠진 정신을, 그럼에도 도무지 꺼트릴 수 없는 열정으로 광기와 논리가 뒤섞인 말을 끊임없이 내뱉는 한 고독한 지성을. (루소를 사랑한 후배들이 어째서 낭만주의운동을 시작했는지 나는 지금 깨닫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역시 ‘지성’의 자리에 ‘영혼’이라는 단어를 넣지는 못하겠다.)

그러니 역자의 우려는 순전한 기우가 아닐까? 그가 설사 미치광이라고 하더라도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미치광이의 심오한 진실을 문학보다 더 잘 전달할 수 있는 형식은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렇게 볼 때에야 비로소 책의 말미에 붙인 일종의 에필로그(‘이 글이 겪은 파란만장한 이야기’)에서 그려지는 일종의 기행을, 모험을 우리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화>를 하나님께 봉헌하기 위해 노트르담 성당의 대제단에 숨어 들어갔다가 대제단 앞에 세워진 철조망에 절망한 후, <대화>의 중요대목들을 손수 필사해 길거리에서 나눠주던 루소의 모습을. 그는 <대화>의 일부가 담긴 편지의 겉봉을 이렇게 썼다.

“아직도 정의와 진실을 사랑하는 모든 프랑스인에게”[각주:35]

*

블랑쇼

블랑쇼 또한 루소에게서 문학을 본 사람이다. 그것은 오늘날 모든 작가들이 처한 어떤 상황, 이를테면 “‘문예(Letters)에 거슬러 말하는 문필가’로서 쓰는 것에 거슬러 쓰는 것이 열중하고, 문학(Littérature)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염원하며 문학에 몰두하고, 이미 아무것도 전달할 가능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쓰기를 멈추지 않는” 행위로서의 문학이다. 그는 이렇게 쓴다.

“루소는 필연적으로 그 <고백>에서 모든 것을 말하려고 할 것이다. 모든 것은 무엇보다 먼저 그의 모든 이야기이며, 그의 모든 생활이다. 모든 것을 말했기 때문에 그는 비난받는 것인데, 오직 그것만이 그가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상스러운 것과 저급한 것, 부정한 것이며, 그것은 또한 무의미한 것, 애매모호한 것, 그리고 무가치한 것이기도 하다. 가까스로 시작했을 뿐인데, 그렇게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파문을 불러일으키는 미친 짓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일을 위해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야기 방식의 모든 규칙과 관계를 끊어야겠다고 통감한다. (…)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쓰기를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중단하면서도 어떤 시기가 되면 싫증을 내지도 않고 다시 그 자서전을 쓰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가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그 시작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고 있는 동안에는 이 처음의 평온하고 행복한 확실성을 느끼고 있지만, 일단 표현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언제나 떨어져 나가고 마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고백>은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데, 거기서 그는 자신을 “모조리 대중에게” 보여 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그들의 시선 앞에” 있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은 그에게 “아주 작은 틈”도 “아주 작은 공허”도 불가능하게 하기 위해, 결코 글쓰기를 멈추지 않도록 강요할 것이다. 이어서 <대화>가 쓰이기 시작한다. 거기서는 ‘모든 것을 이야기한’ 인물이 “만약 내가 어떤 것을 말하지 않은 채로 둔다면, 사람들은 전혀 나를 알 수 없겠지”라는 강박에 의해, 이전에 단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 것처럼 다시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다음에 오는 것이 <몽상>이다. “나 자신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바로 이것이 내가 여전히 추구해야 할 문제이다.” 만약 쓴다는 행위가 그치지 않는 것에 대한 기이한 정념이라면, 말에 의해 들볶여서 쓰는 것에 지치고 싫증이 나면서도, 이제 그만 닥치라는 도전에 부딪히면서도 여전히 “서두르자. 종이 위에 중단되어 있는 말들”을 내던지는 이 인물만큼, 우리에게 이 사실을 백일하게 드러내 주는 이가 또 있을까? 그에게는 가까스로 이 몇 마디를 “다시 읽을 시간만큼 글을 수정할 시간은 더욱 부족”한 것이다.”[각주:36]  (강조는 인용자)

*

블랑쇼처럼 멋진 말을 할 능력이 없는 나는 다만 하나의 문학을 떠올린다. 끊임없이 떠들어대기를 멈추지 않는 한 남자의 절망적인 독백으로 이루어진 짧은 소설을. 특히 책의 첫머리에 놓은 작가의 말을.

카뮈

<전락>에서 말을 하고 있는 사내는 계산된 고백에 열중해 있다. 운하와 싸늘한 빛의 도시인 암스테르담에 묻혀 살면서 은자(隱者)와 예언자의 시늉을 하고 있는 이 전직 변호사는 어떤 수상쩍은 선술집에서 영합하기 잘하는 청중을 기다린다.


그는 현대적인 마음씨를 갖추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남들에게 심판받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서 자기 스스로를 심판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보다 더 자유롭게 심판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가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는 거울을 그는 마침내 다른 사람 앞에다가 쳐들어 보이고야 마는 것이다.

어디부터가 고백이며 어디부터가 남들에 대한 고발일까? 이 책 속에서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심판하고 있는 것인가, 그의 시대를 심판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어떤 특수한 경우일까, 아니면 현대인일까? 이 고심하여 맞추어놓은 거울놀이 속에서 하여간 단 하나의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이 약속하는 바 그것뿐이다.[각주:37]

<전락>을 구상하던 1953년의 카뮈는 자신의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단 한가지의 거대한 목적 : 진실의 인식.[각주:38]

루소와 카뮈가 시차를 두고 공유했던 그 목적은 얼마나 거대한가. 또한 얼마나 도리 없는가. 그렇다면,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문학이 아닐 수 있는가?



*각주*
  1. 장-자크 루소, <에밀>, 피터 왓슨, <생각의 역사 1>(들녘), 30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2. 모리스 블랑쇼, <도래할 책>(그린비) 83쪽 [본문으로]
  3. 스털링 P. 램프레히트, <서양철학사>(을유문화사), 485쪽 [본문으로]
  4. 스털링 P. 램프레히트, 앞의 책, 489쪽 [본문으로]
  5. 버틀런드 러셀, <러셀 서양철학사>(을유문화사), 871쪽 [본문으로]
  6. 피터 왓슨, 앞의 책, 1160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7. 윌리엄 L. 랭어 편,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푸른역사), 220쪽 [본문으로]
  8. 윌리엄 L. 랭어 편, 앞의 책, 238쪽 [본문으로]
  9. 사이먼 크리칠리, <죽은 철학자들의 서>(이마고), 238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0. 마이클 더다, <마이클 더다의 고전 읽기의 즐거움>(을유문화사), 235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1. 버틀런드 러셀, 앞의 책, 877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2. 버틀런드 러셀, 앞의 책, 878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3. 사이먼 크리칠리, 앞의 책, 238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4. 앤서니 케니, <서양철학사>(이제이북스), 235쪽 [본문으로]
  15. 장-자크 루소,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 대화>(책세상), 27쪽 [본문으로]
  16. 버틀런드 러셀, 앞의 책, 873쪽 [본문으로]
  17. 윌리엄 L. 랭어 편, 앞의 책, 229쪽 [본문으로]
  18. 윌리엄 L. 랭어 편, 앞의 책, 230쪽 [본문으로]
  19. 한스 요하임 슈퇴리히, <세계 철학사>(이룸), 572쪽 [본문으로]
  20. 한스 요하임 슈퇴리히, 앞의 책, 572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21. 버틀런드 러셀, 앞의 책, 876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22. 마이클 더다, 앞의 책, 241쪽 [본문으로]
  23.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앞의 책, 570쪽 [본문으로]
  24. 마이클 더다, 앞의 책, 244쪽 [본문으로]
  25. 윌리엄 L. 랭어 편, 앞의 책, 222쪽 [본문으로]
  26. 장-자크 루소, 앞의 책, 309쪽 [본문으로]
  27. 장-자크 루소, 앞의 책, 20쪽 [본문으로]
  28. 장 자크 루소, 앞의 책, 423쪽, 옮긴이 해설 [본문으로]
  29. 장-자크 루소, 앞의 책, 23쪽 [본문으로]
  30. 장-자크 루소, 앞의 책, 154쪽 [본문으로]
  31. 윌리엄 L. 랭어 편, 앞의 책, 242쪽 [본문으로]
  32. 사이먼 크리칠리, 앞의 책, 238쪽 [본문으로]
  33. 장-자크 루소, 앞의 책, 420쪽, 옮긴이 해설 [본문으로]
  34. 장-자크 루소, 앞의 책, 425쪽, 옮긴이 해설 [본문으로]
  35. 장-자크 루소, 앞의 책, 409쪽 [본문으로]
  36. 모리스 블랑쇼, 앞의 책, 93쪽 [본문으로]
  37. 알베르 카뮈, <전락>(책세상), 7쪽 [본문으로]
  38. 알베르 카뮈, <작가수첩 3>(책세상), 137쪽 [본문으로]
0 Comments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