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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 책을 읽게 되어

책세상 2012. 6. 27. 09:50
활자유랑자 금정연

르네 마그리트 作

나는 사회학에 관심이 없다. 우연하게도 중고등학교 시절의 절반 이상을 사회과 과목을 담당한 담임 밑에서 보낸 탓에 생긴 일종의 편견인 셈이다. 하지만 매일같이 매를 맞고 기합을 받고 반성문을 쓰고 화장실 청소를 해본 사람은 안다. 자신에게 그런 벌을 준 인물이 가르치는 과목을 좋아하기란 정말이지 어렵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는 어려운 일에는 관심이 없다. 교육사회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이런 태도를 논리적으로 분석할 수도 있겠지. 멋진 일이다. 그렇다고 굳이 내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성학과 관련된 사회학과 전공수업을 몇 차례 수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여성'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학'이야 아무래도 좋았단 말이다. 당시의 성적표가 그 증거다. 물론 나는 성적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성적인 것이라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아무런 회한도 없이 말하지만, 그건 여전히 마찬가지다. 나도 제법 고집스럽게 한 길을 걸어온 셈이다.

내친김에 하나 더. 나는 자서전이란 형식 또한 좋아하지 않는다. 여기엔 해묵은 오해가 있다.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이다. 소년소녀 세계명작의 세계 속에서 더없이 평온한 날들을 만끽하던 내게 한 권의 책이 찾아온다. 포마드를 바른 머리에 네모난 턱을 가진 청년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책이다. 등교 준비를 하며 훔쳐보던 아침방송에서 종종 보게 될 얼굴.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나와 같은 세대의 사람이다. 그렇다. 그 책은 다름 아닌 《7막 7장》이었다. 나 역시 그 책을 읽었고, 독후감을 썼고, 아름다웠던 유년시절에 작별을 고했다. 말 그대로, 세대적인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은 생각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모든 자서전을 미워할 필요는 없다고. 고작 '진로 포도주'를 마신 후 모든 와인에 편견을 갖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라고. 당신 말이 맞다. 하지만 나의 고백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 책을, 젊은 유학생의 허세 가득한 자서전 아닌 자서전을,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었다. 그것도 몇 번씩이나. 심지어 "과거의 얘기가 아니라 내일을 여는 책이기 때문"에 마침표를 쓰지 않는다던 패기에 압도당해 그처럼 살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다. 아마 나는 세상의 모든 책은 항상 옳다고 믿었던 것 같다. 순진한, 때론 치명적인 착각.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보다시피 이 글에는 마침표가 있고, 내겐 내일을 열 생각이 없다. 국어 수업과 유학 따윈 꿈꿀 수 없는 가계와 도리 없이 먹어버린 나이가 나를 구한 셈이다. 그럼에도 부끄러운 과거다. 지울 수 없는 과오다. 당신이 지금 이 페이지를 닫는다고 해도 내게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방법은 하나, 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문인들의 자서전을 제외한 모든 종류의 자서전을 멀리할 것. 내겐 누군가가 뻔뻔하게 늘어놓는 자화자찬과 과도한 의미 부여에 대항할 수 있는 내성이 없다는 판단에서다. 그리하여 3년이 넘는 시간을 인터넷 서점의 인문사회 MD로 일하는 동안, 나는 담당 분야였던 정치인의 자서전, 그러니까 《함박웃음》 같은 책들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 놀랄 일은 아니다. 읽지 않은 책이 꼭 그것만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건 또 다른 문제다. 나는 다만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만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살면서 나는 그보다 실용적인 책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나는 지금 어느 사회학자의 지적 자서전에 대한 서평을 쓰고 있다. 세상에, 나는 생각한다, 이보다 '어쩌다'란 단어가 어울리는 일이 또 있을까?

*

물론 세상은 넓고, 그런 일이 매양 일어난다고는 할 순 없겠지만, 그리 드물지도 않은 모양이다. 이를테면 피터 버거의 경우. 60년이 넘는 자신의 학문적 경력에 대해 아무런 회한도 없이 "나의 지적 이력은 착각에서 시작됐다"고 고백하는 인물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 남자가 뉴욕에 있는 한 유대 식당에 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웨이터가 중국인인데, 우아한 리투아니아 이디시어로 말하더란다. 남자가 식당을 나가다 식당 주인이 보이자 말했다.
"여기 중국인 웨이터가 있던데요?"
"예, 일 년 전에 상하이에서 왔답니다."
"그런데 이디시어가 완벽하더군요."
그러자 주인이 말했다. "쉿, 그 사람은 자기가 영어를 배우고 있는 줄 알아요."
나도 내가 미국 사회학을 배우는 줄 알았다.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14쪽)

부모와 함께 미국에 온 열여덟의 피터 버거는 목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미국 사회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고 싶었다. 그는 신학 공부를 뒤로 미루는 대신,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기로 한다. 미국에서 배우는 언어라면 당연히 영어일 거라고 생각한 중국인처럼, 미국에서 배우는 사회학이란 당연히 미국 사회에 대한 학문일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주팔자를 공부하기 위해 철학과를 선택하는 일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착각이었다.

그가 택한 곳은 뉴욕의 사회 조사 뉴스쿨. 사회학이 뭔지도 몰랐던 그가 심사숙고해서 결정을 내렸을 리 없다. 그는 가난했고, 학비를 벌어야 했다. 다시 말해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대학원 과정을 마칠 수 있는 곳이 그곳밖에 없었던 것이다. 뉴스쿨이 당시 미국 사회과학계에서 얼마나 변방이었는지는 그가 알 바 아니었다. 그는 첫 강의로 '사회학자 발자크'라는 이름의 강의를 들었고, 우연히 만난 발자크는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그에게 사회학자란 무엇이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분명하게 각인시킨 것이다.

그러한 시각, 발자크가 갖고 있었다고 잘로몬이 말한(맞건 그르건 간에) 그 시각은 인간이 하는 온갖 짓들에 대한, 특히 상류 사회에서 감추고 부정하는 행위들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이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경스럽고 폭로적이고 전복적인 시각이었다. 발자크가 진정 잘로몬이 말했던 그런 사람, 그러니까, 도시의 비밀을 캐려고 되도록 밤에 파리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살롱과 관청과 상점과 선술집과 매음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이해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는지 아니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내 마음속에 새겨진 사회학자의 상이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거기에 실렸던 내 젊의 혈기는 누그러졌어도 그 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15쪽)

그는 뉴스쿨에서의 배움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사회학이 학대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신화들의 정체를 폭로함으로써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믿음과 "사회학은 '인문학'(혹은 정신과학)의 하나로 역사와 철학과 가까울 뿐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이 갖는 직관적 통찰과도 밀접하다는" 시각이 그것. 이것은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어져온 그의 사회학적 탐구의 고갱이가 되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담임은 물론 사회학과 교수들을 통해 내가 접했던 사회학과는 사뭇 다른 지점이다. 버거는 '그들의 사회학'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최근 수십 년간 사회학은 두 가지 병을 앓고 있다. 정량적 방법에 적합한 현상이 아니면 연구하려 들지도 않는 지경에 이른 맹목적인 방법론 숭배와 늘 똑같은 주문만 되뇌고 있는(가끔은 풍부한 어휘를 구사해가면서) 이데올로기적 선전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질병 탓에 사회과학이 갈수록 따분해지고 있다. 정량적 방법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유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베이 리서치에 들어가는 비싼 비용을 기꺼이 대주는 이들의 이해관계 탓에 정교한 방법으로 사소한 문제를 연구하는 일들이 갈수록 흔해지고 있다. 이데올로기적 슬로건 문제에 이르면, 30년 전에는 흥미가 있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하품만 나오는 실정이다. (9쪽)

이런 피터 버거의 일침은 사회학에 대해 갖고 있던 나의 편견을 정당화시켜주는 동시에(사회학의 대가가 보기에도 이제는 하품만 나오는 실정이라지 않은가!), 사회학에 대한 나의 편견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이런 사회학도 있다, 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

자신의 사회학적 모험담을 들려주며 그는 종종 녹록하지만은 않은 사회학 이론을 동원하지만, 그런 개념들은 사회학에 무지한 독자를 주눅 들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지난 책들과 그가 인용하고 있는 학자들의 책을 보관함에 담도록 부추길 뿐이다. 그건 전적으로 그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과 유머러스한 문체 탓이다. 그는 가르치려 들지도,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독자를 유혹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 자신을 평생 동안 사로잡았던 "변덕스러운 인간 세상에 대한, 또 그걸 이해하려는 노력에 대한 끊임없는 매혹"을, 그 열정을 고스란히 보여줄 뿐이다. '사회학자 발자크'라는 수업으로 사회학에 첫발을 내디딘 학자답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 이어지는 책의 내용을 길게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가 이미 솜씨 좋게 간추린 개인의 지적 여정이고, 그가 살아온 시대에 대한 간략한 사회학적 분석이며, 사회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지식사회학적 요약이다. 더 이상 요약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내겐 그의 사회학적 작업에 대해 무어라 평가할 만한 지식이 없고, 내가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늘어놓는 일에도 별 관심이 없다. 그저 그런 문외한이 읽기에도 무척이나 흥미로웠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뿐.

다만 그의 책을 읽으며 대부분의 자서전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모종의 편견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짚고 넘어가고 싶다. 그는 "허심탄회하고, 자기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취급하지 않고, 그리고 스타일과 위트가 지성을 고양해준다고 생각하는 태도"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건 물론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를 통해 피터 버거 자신이 몸소 실천하고 있는 태도이고, 철만 되면 쏟아지는 국내 유명 인사들의 자서전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태도다. 그들의 책에는 마침표만 없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것은 또한 내게 어떤 자서전을 바라보고 평가할 수 있는 하나의 입장을 제시해주었다. 말하자면 자서전에 대한 내성을 만들어주었다고 할까. 더 이상 번드르르한 '자뻑'에 속아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서전이라는 형식 자체를 기피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고마운 일이다.

그가 한 사람의 학자로서 내내 견지하고 있는 태도 또한 나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했다. 한 분야의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분야는 물론, 그 밖의 다양한 사회문제에 이르기까지 객관적인 시각을 가장한 채 편향된 의견을 주장하는 이들에 대한 경각심이다. 피터 버거는 객관성이란 가면이 얼마나 기만적인지 폭로한다.

객관성이란 사회과학자가 세상을 이해하고자 할 때 지향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의 전 존재를 말하는 게 아니다. 베버의 용어로 말하자면, 과학이라면 모름지기 '가치 중립적'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가치 중립적' 과학자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도덕적으로는 괴물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중 시민권'이라는 개념이 유용하다. 사회과학자는 두 개의 모자를 쓴다. 그는 특정 분석 규준을 충실히 지켜야 하는 학문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도덕적인 고려를 해야만 하는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그 두 모자는 상당히 다르다. 특정 진술을 할 때는 어떤 모자를 쓰고 했는지 분명히 밝혀서 정직하게 알려줘야 한다. (281쪽)

턴 혹 作

'이중 시민권'이란 "객관적인 관찰자와 사회 구성원의 입장에서 도덕적인 참여자 사이"에 존재하는 균형점이다. 그는 광신에 빠지지 않기 위해 사회학자의 '이중 시민권'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물론 그것이 비단 사회학자에게만 필요한 모자는 아닐 것이다. 스스럼없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보수주의라고 단언하고, 종종 진보주의자들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프레시안북스 95호에 실린 노명우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꼴통'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소위 말하는 전문가들의 토론에서부터 주변 친구들과의 논쟁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흔히 자신의 의견이 객관적이고 그렇기에 옳다는 주장들을 만나곤 한다. 피터 버거에 따르면, 좌우를 막론하고, 그런 인간들이야말로 꼴통이다. 무엇보다 그런 말은 지루하다. 사심을 담아 말하자면, 객관적인 입장을 가장한 서평 또한 지루하긴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는 지루한 것엔 관심이 없다.

이쯤에서 책의 부제를 상기하며 마무리해야겠다.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의 부제를 피터 버거는 [How to explain the world without becoming a bore]라고 썼다. 직역하면 '지루하지 않게 세상을 설명하는 법' 정도 되겠다. 피터 버거는 성공했다. 어쩌다 집게 된 책을 무척이나 즐겁게 읽었고 사회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몇 개의 편견 또한 깨트렸으니, 나 또한 성공했다고 해두자. 물론 이 서평의 성공 여부는 또 다른 문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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