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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 이야기/편집자 분투기

예술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하여

책세상 2012. 10. 30. 11:48

다원주의 미학
―자유로운 예술, 열린 비평 | 김진엽 지음

만약 제목이 ‘다원주의의 미학’이었다면 ‘느림의 미학’처럼 그 사유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책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미학의 다원주의’라면 미학이라는 영역에서 다원주의 사상을 이야기하는 책이었을 것이다. ‘다원주의 미학’은 이 둘을 모두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다원주의는 무엇일까. 또, 미학은 무엇인가.

저자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답변하는 일이 미학의 주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말한다. 다원주의 미학은 이 질문에 대한 저자 나름의 답변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논의는 예술에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삶의 미학’(리처드 슈스터만)을 소개한 저자의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삶은 세상과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며 경험을 낳는다……경험을 통해 우리는 진리를 지속적으로 구성하고 또 재구성해나가야 한다……여기서 우리는 다원성과 마주한다.”(18∼19쪽)

역설적이게도 다원의 대척점에 있는 듯한 ‘비非’ 미학이 떠오른다. 바디우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유나 예술의 본성에 대한 탐구로서의 미학이 아닌, 스스로 진리를 만들어내는 각 예술에서 그 진리를 발견해 탐구하는 비미학에 관해 썼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그 자체가 하나의 진리 절차이며, 그 진리는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하고 독특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예술적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적 진리들이 ‘무한’하게 있다. 다원주의 미학에서 삶과 예술과 문화의 다원성은 바디우의 철학처럼 무한으로 뻗어 나간다.

파울 클레, 낚시꾼(1921)

하지만 지금 우리 시대의 진리(?)인 자본주의는 다양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지양한다, 는 것을 우리는 안다. 자본주의는 다양성을 조장하나 그 다양성은 시장을 거쳐 하나로 수렴되고 획일화된다. 그래서 자유와 다양성을 꿈꾸는 다원주의는 밀의 자유주의에서 발원했으나,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에 가닿는다.
“내가 오늘은 이 일을 하고 내일은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낚시를 하고 저녁에는 소떼를 돌보며 저녁 후에는 비평 활동을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것도 내가 단지 그렇게 하고 싶어서이므로, 사냥꾼, 어부, 목동, 비평가 등등이 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라는 마르크스의 사회적 유토피아는 다원주의 미학을 통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와일드 또한 다양한 문화의 활성화를 위한 전제 조건으로 사회주의를 염두에 두었다.

“다원주의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일상의 생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의 삶과 다양한 양식의 예술이 꽃피우리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183쪽)

그렇다면 지금을 다원주의가 도래한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변방에 있다는 ‘호모 사케르’(아감벤)가 도처에 있다. 생존이 위협받고 소수자로 차별받는 일들이 과거나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바로 지금 여기 나의 일이다.
다원주의 미학은 이러한 시대에, 지배와 모욕 없이(리처드 슈스터만) 상생하는, 호모 사케르에서 ‘호모 아르텍스’(채운)로 살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삶의 미학이다.

앞서 이 책이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라고 했던가. 정정해야겠다. 이 책은 답변이 아니라 ‘무엇이 예술이 아니란 말인가’라는 새로운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자신의 삶을 가꾸어나가는 잠재적 예술가로서의 독자들의 몫이 아닐까. 답변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도 풍요로워질 것이다. 그것이 저자가 꿈꾸었던 이 책의 역할이다.

덧붙여, 어느 독자의 말처럼 ‘보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저도 모르게 손이 가는’ 디자인으로 책을 돋보이게 해준 디자이너에게 감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질문을 너무도 정갈하게 던져준 저자에게 감사한다.

*이 글은 출판 격주간지《기획회의》330호(2012. 10. 20)에 실린 글을 편집한 것입니다.


_편집부 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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