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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 기일, 카뮈를 닮은 서른셋 소년이 띄우는 편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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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 기일, 카뮈를 닮은 서른셋 소년이 띄우는 편지

책세상 2013.01.04 10:45

며칠 후면 저는 서른세 살이 됩니다.
아니, 이미 되었네요.

언제나처럼 할 일을 미룬 채 게으름을 피우느라 마감을 넘기고 말았습니다. 뭐 대단한 걸 쓰겠다고,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좋아하는 것에 대해 쓰기란, 그것이 무엇이건, 좀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요.

늘 그렇듯이 저는 또 지각생이 되었네요(정확한 시간에 닿지는 못해도 약속은 엄수하죠). 그렇지만 사람은 본래 싫어하는 일에는 기꺼이 시간을 지키는 법이지요(치과에 가는 거라면 결코 지각을 하지 않거든요).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믿고 마음을 놓는 거죠. 하기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상대하는데 뭣 하러 시간을 잘 지켜야 한단 말입니까, 그들은 거기 와 있는데 말입니다.
— 1949년 4월 25일, 알베르 카뮈가 장 그르니에에게 (244쪽)

몇 번이나 당신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나도 점점 더 편지를 쓰는 일이 드물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기껏해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편지들에나 엄두를 내어 답장을 하는 겁니다. 아무 관심도 없는 것들에 대해서만 말하면 아주 편하거든요!
— 1950년 4월 7일, 장 그르니에가 알베르 카뮈에게 (265쪽)

해가 바뀌는 동안 저는 <카뮈-그르니에 서한집>을 읽었습니다. 제야의 종소리를 듣는 것도, 떡국을 먹는 것도 잊은 채 밤을 새워서요.
서른두 살의 저와 서른세 살의 제가 함께 읽었던 셈이지요. 일 년 동안의 독서, 라고 할까요. 하기야, 이건 그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해가 바뀌었을 뿐, 평소와 다름없는 걸음의 독서였으니까요. 덩달아 마감을 일 년이나 넘기고 말았지만 그 또한 놀랄 일은 아니겠지요. (혹시 당신도 마감을 넘긴 일이 있나요? 만약 있다면 어떤 핑계로 위기를 모면했나요?)

하지만 펼쳐진 책 속에서는 커다란 시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소설의 시간과는 다른 삶의 시간이, 이십팔 년이라는 적지 않은 세월이. 그동안 자신의 조용한 야망에 시달리던 청년 카뮈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문호가 되었고, 그런 제자를 변함없이 지지하던 젊은 선생은 세상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스승이 되었습니다(머리가 벗겨지기도 했고요). 그리고 그건 제게 제법 놀라운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니, 벗겨진 머리 말고,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우정 어린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 말이에요.

먼저 한 가지 고백할 게 있어요. 제가 사랑한 것은 그르니에가 아닌 카뮈였습니다. 언제나 그랬어요. 그르니에의 책을 아껴 읽던 시절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 그것이 카뮈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굳이 밝힐 필요가 있을까요? — 가뭇없이 사라지는 시간을 살며 거듭 붙잡은 것은 결국 카뮈의 책이었으니까요. 종종 그르니에의 <섬>을 다시 펼치기도 했지만, 대개는 카뮈의 유명한 서문을 다시 읽기 위해서였습니다. 누군가 어떤 책에 대해 열렬한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은 언제나 감동적이죠. 특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기에 이 서한집을 읽으며 저는 카뮈에게 스스로를 이입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성공을 필요로 했던 어린 소년이 그토록 꿈꾸던 위대한 예술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따라 읽었던 거예요. 그건 인류의 오랜 고전에서부터 소년 만화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반복된 이야기라 해야겠지만, 동시에 언제 들어도 근사한 이야기가 분명하니까요. 그때 스승의 역할이란 젊은 제자가 품고 있는 가능성을, 그 씨앗을 세심하게 돌보는 일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름다운 꽃에 감탄합니다. — 정원사의 노고가 아니라. “왼손은 그저 거들 뿐”이라는 어느 소년만화의 대사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거죠.

그건 아마도 제가 덜 자란 어른이기 때문일 겁니다. 여전히 내 안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길을 밝혀줄 누군가를 그리고 있기에 — 하지만 어느 누가 그러지 않을까요? 오늘 멘토를 자처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말씀을 기다리는 독자들을 보세요. 그런 범박한 위로나 훈계, 가르침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또 다른 문제가 될 것입니다. 제가 지금 너무 나쁘게 말하고 있나요?

어쩌면 단순한 편집의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겠어요. 235통의 편지가 담겨 있는 이 서한집의 첫 26통은 그르니에에게 보내는 카뮈의 편지니까요. 그르니에가 카뮈의 모든 편지를 보관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언젠가의 카뮈는 그것들을 모두 태워버린 것입니다. “나는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다 태웠소 — 나에게 가장 소중했던 이들 — 나의 자랑이었던 이들 — 내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던 이들 — 그르니에, 외르공, 클로드, 잔, 마르그리트, 크리스티안, 모든 남자들, 모든 여자들. 모든 것이 다 타버렸소. 내 가슴속에서 과거의 오 년이 비워져버렸소.” 그 마음이야 그저 짐작할 수 있을 뿐이지만, 제 마음을 말하자면, 그다지 아쉽지는 않았습니다. 카뮈의 편지가 남았으니까요. 그러니 아마 처음 생각이 맞을 겁니다.

그르니에가 카뮈를 만난 것은 1930년, 그가 알제의 한 고등학교에 철학교사로 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카뮈는 열일곱 살이었지요. 결핵으로 학교를 잠시 쉬었던 카뮈가 학업에 복귀한 1931년부터 그들은 친분을 쌓아가기 시작합니다. 물론 말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었어요. 두 사람 모두 조금은 조심스러운 성격의 사람들이었고 — 나는 당신이 이것을 소심함의 증표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그중 한 사람은 여느 청소년들처럼 세상에 대한 불신과 적의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요. 그르니에는 당시의 카뮈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위대함에 대한 욕망, 고귀함에 대한 동경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을 선택하는 데에서도 드러나곤 했다. 그가 천성적으로 조심성 많은 사람이었다고 해서, 그에게 온정의 천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조심성은 물론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취지를 함축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진부한 것과 비열한 것에 대한 소박한 방어의 태도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그의 평가와 우정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ㅡ<카뮈를 추억하며> 16쪽

어때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카뮈와 닮았나요?

<카뮈-그르니에 서한집>의 첫 번째 편지는 카뮈가 그르니에에게 보낸 1932년 5월 20일의 편지입니다. “선생님의 견해를 저에게 유익한 가르침으로 삼겠습니다”라고 허두를 뗀 카뮈는 자신이 쓴 글을, 처음으로 써본 작품을 그르니에가 읽어주길 바란다고 쓰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읽어보시고 소감을 말씀해주신다면 그에 따라 저는 제가 정했던 목표, 현재 저의 처지를 잊어버린 채 추구하고자 노력하려던 목표를 그대로 간직하든가 포기하든가 할 생각입니다.” 과연 열아홉 살의 청춘답게 극단적이네요. 그르니에의 소감이 어땠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린 채 추구하고자 노력하려던 목표”를 그대로 간직하고 마침내 이루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르니에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았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카뮈는 계속해서 그르니에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그의 아버지나 다름없었던 이모부와의 갈등에서부터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했던 질병의 고통,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청소년기의 불안과 그를 낙담과 희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왕복운동하게 했던 야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것들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믿음에 자신을 바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포기한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 믿음이 나를 으깨버리고 나를 — 벌거벗은 것처럼 — 혼자 버려두는데.
제가 느끼는 것은 반항도 아니고 절망도 아니고 그저 무관심입니다.
어쩌면 이건 결국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일 테지요 — 사실 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 오직 선생님의 우정밖에는 — 그 또한.
A. C.
— 1933년, 알베르 카뮈가 장 그르니에에게 (23쪽)

분명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카뮈의 모습이 아닙니다 — 쓸쓸한 표정으로 짧은 담배를 물고 있는 미남자,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던 작가, 이념도 사상도 아닌, 조금 촌스러울 정도로 ‘정의로운 것’을 추구하던 인간(이런 그를 가리켜 수전 손택은 “당대 문학의 이상적 남편”이라고 불렀죠. 물론 그것은 믿음직함, 관대함, 점잖음 등의 미덕과 함께 약간의 고리타분함을 의미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고뇌의 시간이 있었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카뮈가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제가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지금 제겐 정말이지 꼭 한 가지 야심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되고 싶다는 것이지요. 가능한 한 가장 단순하게 말입니다. 물론 이것도 역시 오만이겠지요. 그러나 저는 지금 너무나 지쳐 있고 너무나 헐벗은 상태라서 이 오만이 제게는 유일한 보호장치인 것 같습니다. 삶에 대하여 아무것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따지려고 들기 전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요. 한사코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자 하는 것보다 그것이 더 낫습니다. 특히 저처럼 자신을 별로 잘 알지 못하는 경우는 특히 그렇습니다. — 1933년, 알베르 카뮈가 장 그르니에에게 (26쪽)

바로 이것이 훗날 <시지프 신화>로 발전하게 될 생각의 씨앗임을 우리는 곧바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할까요? 언젠가 빅토르 프랑클 박사가 말했던 것처럼 “일이 다 끝난 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판결을 내리기는 쉬운 법”입니다(그러고 보니 “삶에 대하여 아무것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프랑클이 주장이기도 하네요. 2차 세계대전을 각각 다른 상황, 다른 곳에서 치러 낸 이들의 동시대적 감각일까요). 아마 오늘 우리라면 그런 그의 고민을 ‘중2병’이라느니, ‘허세 쩐다’느니 하는 간편한 말로 일축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뭐, 별수 없죠. 다들 각자의 시대를 사는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요.

장 그르니에와 카뮈(AFP)

그를 다시 생각하거나 그의 편지를 다시 읽을 때, 그리고 내 기억 속에서 그가 한 말들의 메아리를 들을 때면,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그가 공공연하게 내보인 확신과 때때로 드러낸 냉정함 또는 그의 단순한 초연하는 태도 사이의 대조, 그의 확신과 그가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물음을 제기했다는 점 사이의 대조를 거의 피부로 느끼게 된다. 전쟁 직전에 그는 나에게 편지를 써 보내곤 했다. 그 편지들에서 그는 내가 기대하고 있던 것과는 반대로 진정한 사상가가 될 자신이 없다고, 사상의 역설적인 측면, 신랄하고 안이한 측면에 끌리고 있으며, 이는 이미 지적 정직성의 징표가 아니라고 토로했다. 그런데 이러한 근심은 그가 아마추어 예술가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ㅡ<카뮈를 추억하며> 30쪽

끊임없이 고뇌하고 낙심하던 카뮈를 지탱했던 것은 그르니에와의 우정이었습니다. 비록 카뮈는 그것을 일반적인 의미의 우정이라기보다는, 비굴함 때문이 아닌 특유의 촌스러움 탓에, 자신이 신세를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더 좋아했지만요(반면 그르니에는 “당신이 내게 신세 진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나를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의 나이가 아주 어렸었다는 이유 바로 그것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그들의 관계가 동등함을 강조했습니다만, 이게 중요한가요?). 그들의 관계는 카뮈가 학교를 졸업하고, 그르니에가 다른 나라로 떠난 후에도 계속되며,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더욱 깊어집니다.

카뮈는 언제나 스승에게 자신의 작품에 대한 조언을 구했고, 그의 의견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카뮈-그르니에 서한집>을 통해 <이방인>, <시지프 신화>, <칼리굴라> 등의 초기 작품을 비롯한 카뮈의 작업에 대한 그르니에의 꼼꼼한 비평(때로는 첨삭)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비평집이 아니고, 전기도, 그렇다고 소설도 아니기에 우리가 각각의 편지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우선 그들 생활의 냄새입니다 — 2차 세계대전 동안 겪어야 했던 식량난(카뮈는 직접 채취한 버섯을 가루로 만들어 그르니에에게 보내기도 합니다)에서 돈 문제(친한 사이에 돈거래는 하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그들은 과연 훌륭한 작가답게 신용을 지킵니다), 책이나(물자가 부족한 탓에 카뮈는 책을 쌌던 포장과 노끈을 돌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합니다) 집을 구하는(그르니에는 카뮈에게 “무엇보다 ‘세입자’를 들이면 안 됩니다!”고 강조합니다) 문제, 가족의 건강 문제와 시시콜콜한 생활의 문제들(그르니에는 손자를 위해 카뮈가 연출한 연극표를 부탁하기도 합니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소소한 일상이 마치 친한 친구의 그것처럼 가깝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서로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삶의 대부분을 각기 다른 나라에서 보낸 그들은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각자의 사정 탓에 많은 경우 만남은 어그러지고, 또 틀어집니다. 자꾸만 엇갈리는 연인들의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읽는 이가 더 안타까울 지경이에요. 아마 제가 드라마나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이겠지요.

오히려 부족한 것은 역사적인 사건들입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식량난에 대한 토로와 몇 가지 일들을 제외하면, 그들의 편지에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를 통해 카뮈가 널리 이름을 알린 직후에도, 사르트르와 그 유명한 논쟁을 벌일 때에도, 그런 외부적인 사건들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어요. 심지어 카뮈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조차도, 몇 줄의 짧은 편지가 오고 갔을 뿐입니다.

이번에도* 과연 당신의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생쥐스트의 글을 읽었더니 이런 말이 있더군요. “사람은 누구나 스물한 살이 되면 신전에 들어가서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자신의 친구라고 엄숙히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해마다 풍월(공화력의 제6월)에 그 사실을 다시 선언해야 한다.”
앞당겨 그 사실을 선언하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J. G.
— 1957년 11월 7일을 위하여, 장 그르니에가 알베르 카뮈에게 (336쪽)
*1957년 10월 16일, 카뮈는 자신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잠시 후면 투우*가 끝날 것입니다. 황소가 죽었으니까요. 아니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애정 어린 인사를 전하며. A. C.
— 프랑신 카뮈가 스톡홀름에서 그르니에 부부에게 보낸 12월 13일자 엽서에 덧붙여,
알베르 카뮈가 장 그르니에에게 (337쪽)
*노벨상 수상에 따르는 각종 의무적인 행사들을 빗대어 하는 말.

하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봅니다. 본다고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요. 이미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함께 나눈 시간을, 그리고 쌓아올린 관계를 알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그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읽으며 “모든 것이 개인에서 시작하고 개인으로 귀착한다”(87쪽)는 그르니에의 생각이나, “아마도 향수 때문인 것 같습니다만, 저는 이렇게 하여 점점 더 인간의 몫 중에서 역사에 속하지 않는 일면으로 다가가게 됩니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저는 우리가 역사 밖에서 죽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181쪽)과 같은 문장들의 의미를 곱씹어 생각할 수도 있겠죠. 아무래도 좋은 일입니다.

카뮈는 1959년 12월 28일의 편지에서 “<섬>의 새로운 판본을 받아 보았으면 했는데 출판이 늦춰졌나요?”라고 묻고 있습니다. 자신이 쓴 그 유명한 서문이 실린 새로운 판본에 대해서. 하지만 일주일 후인 1월 4일, 친구 미셸 갈리마르가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파리로 가던 도중 교통사고를 당한 카뮈는, 두개골이 파열되고 척추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맙니다. 유달리 쾌활한 어조로 쓴 편지의 마지막에서 자신이 한 인사를 지키지 못한 채 — 스스로의 죽음으로 부조리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며칠 전에 어떤 경관이 제 자동차를 세우더니 제게 무슨 글을 쓰느냐고 묻더군요(제 직업이 운전면허증에 기록되어 있었으니까요). 전 “소설을 씁니다” 하고 간단히 대답했지요. 그랬더니 강조하듯 다시 묻는 거예요. “애정소설입니까, 아니면 탐정소설입니까”라고요. 마치 그 둘 사이에 중간은 없다는 듯이!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반반이죠, 뭐.”
곧 다시 뵙겠습니다. 자주, 아주 자주 선생님을 생각하곤 합니다. 늘 같은 마음으로 말입니다.
선생님과 가족 분들의 건강을 빌며.
알베르 카뮈
— 1959년 12월 28일, 알베르 카뮈가 장 그르니에에게 (360쪽)

반면 새해 첫날에 쓰인, 카뮈의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한 그르니에의 마지막 편지는 다음과 같은 추신으로 끝을 맺습니다.

<섬>은 루르마랭으로 우송합니다.
— 60년 1월 1일, 장 그르니에가 알베르 카뮈에게 (364쪽)

루르마랭으로 우송된 <섬>은 카뮈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배달되었고, 카뮈는 “이제 이 책은 내 것이라기보다는 당신의 것이라고 해야겠어요. 건강하시오. 1960년 1월 1일, 장 그르니에”라고 서명된 그 <섬>을 결코 볼 수 없었습니다. 물론, 제가 가지고 있는 <섬>에도 그의 서명은 없고요.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문득 이건 너무 멜로드라마적인 편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지금 그들의 삶을, 작품을, 시대를, 역사를 모두 무시한 채 멋대로 잘라 붙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삶은 결국 이야기이겠지만, 결코 이야기만은 아니고, 더욱이 이런 통속적인 플롯의 이야기는(어쩐지 [서프라이즈]에 나올 것 같은 이야기가 되지 않았어요?) 아닐 테니까요. 역시 드라마나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이겠지요. 반성합니다. 새해에는 조금 줄이도록 할게요. 이왕 이렇게 쓴 것을 어쩔 수는 없었습니다. 죄송해요.

카뮈(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作)

책장을 덮으니 서른세 살이 되었습니다.
아까 이야기했던가요?
기록적인 한파에 거리는 꽁꽁 얼었네요 — 실은 담배를 사러 딱 한 번 밖에 나갔을 뿐입니다. 그것도 아주 잠시.

서른세 살의 저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아까 사온 그 담배요), <카뮈-그르니에 서한집>의 표지를 새삼스레 바라봅니다. 작은 얼굴들이 있고, 녹색의 원제와 검은색의 번역 제목이 있으며, ‘1932~1960’이라는 숫자가 있네요. 참, 그거 아세요? 그들이 편지를 나누기 시작하던 때의, 그러니까 1932년의 그르니에가 제 나이와 가깝다는 것을. 1898년에 태어났으니 우리 나이로 서른다섯이 — 다시 말해, 처음 카뮈를 만났을 때 그르니에의 나이가 바로 제 나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스스로를 언제나 카뮈 쪽에 대입해서 생각했는데 어느덧 이런 나이가 되어버린 거예요, 세상에.

그리고 그건 오직 저 자신만을 생각하며, 있는지 없는지조차 더는 알 수 없는 내면의 가능성을 끌어내줄 스승을, 길을 밝혀줄 그를, 한 마디로 구원자를 기다리기에는 너무 나이를 먹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그건 결국 성장하는 소년의 플롯에 집착하기엔 너무 늙었고, 진부한 멜로드라마의 플롯에 이입하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걸 제외한 다른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모른다는 것으로 그저 족하기로 하겠습니다. 아직 새해니까요. 날도 춥고.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너무 많아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 바로 이렇게.

마음으로부터의 우정을 보냅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2013. 1. 4.

활자유랑자 금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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