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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 로맹 가리(혹은 에밀 아자르)를 마주한 십 년 차 편집자의 고백 본문

책세상 이야기/편집자 분투기

거장 로맹 가리(혹은 에밀 아자르)를 마주한 십 년 차 편집자의 고백

책세상 2013.03.25 16:48
로맹 가리의 첫 작품 《유럽의 교육》
섣불리 희망을 말할 수는 없더라도 절망에 굴하지는 말아야 한다

 

로맹 가리

로맹 가리

하늘같은 선배님께서 보면 코웃음을 칠 일이지만, 올봄은 내가 ‘업계에 진출’한 지 십 년이 되는 해다. 길지도 않지만 짧지도 않은 시간을 돌이켜보건대, 신입시절부터 참 좋은 작가들의 책을 만들 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는 참 운이 좋은 편집자였다. 그 풍요로운 초짜 시절을 장식해준 많은 작가들 중에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로맹 가리가 있다. 학창시절부터 무척 좋아했던 그의 작품을, 그것도 전설적인 《자기 앞의 생》을 교정지로 마주했을 때를 떠올려본다. 번역자의 문장에 감히 손을 댄다는 두려움, 거장의 작품을 훼손할세라 전전긍긍하던 마음, 소설에 너무 빠진 나머지 울컥해 화장실에서 몰래 흘리던 눈물…… 그리고 십 년 후, 공교롭게도 그때와는 다른 책상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앉아 로맹 가리의 첫 작품을 마주하게 되었다.

《유럽의 교육》은 2차세계대전 당시를 배경으로, 빨치산들이 항독투쟁 중인 숲에 들어간 열네 살 소년이 진정한 용기와 사랑을 배우며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로맹 가리의 문장의 온도는 뜨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소년과 빨치산들, 그리고 나치 독일의 만행 아래 고통 받는 이들의 이야기는 인간 존재에 대한 희망을 거두어간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명하다. 섣불리 희망을 말할 수는 없더라도 절망에 굴하지는 말아야 한다, 인간의 역사는 그렇게 작디작은 발걸음들로 진보해왔다…… 《유럽의 교육》에서는 처녀작에서 발견되기 마련인 미숙함이나 젊은 치기를 찾아볼 수 없다. 작가의 최고 기량이 발휘된 《자기 앞의 생》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교육》은 고통과 비참에 대하여 구구하게 늘어놓지 않고도 그 슬픔을 적확하게 포착하여 보여준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 작가의 시선은 작품에 놀라운 생명력과 입체감을 부여한다. 2차세계대전 후 유럽 지식사회는 인간 이성에 대해 철저하게 회의했고, 세계는 극단적 허무주의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에 항변이라도 하듯 로맹 가리는 작중 인물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다. 한 줄기 빛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시절에도, 나약한 인간성 앞에서도 ‘중요한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가슴속에 희망을 품은 이들은 어떤 고난 앞에서도 약해지지 않는다고. 그들은 인간 존재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고 가슴속에 불을 지핀다. 그리고 그 불길은 사람들에게 옮아가 이 세상을 조금은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겨울
봄은 언제 올까?

이 글을 쓰고 있는 2013년 3월 11일 0시를 기해 북한이 정전협정을 파기했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평온한 일상은 계속되어 있지만, 포털사이트의 뉴스가 전해주는 소식들은 뒤숭숭하기만 하다. 로맹 가리의 말대로 얼마나 더 많은 꾀꼬리들이, 얼마나 더 많은 아름다운 노래들이 필요한 걸까?

_편집2팀장 김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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