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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스타일, 위험한 것만이 우리를 뒤흔든다

책세상 2013.05.09 10:37
《니체의 문체》 번역에 붙여


변학수 (경북대 교수)

우리는 일반적으로 문학이라고 하면 ‘즐거운 것’을, 그리고 철학이라고 하면 ‘진지한 것’을 떠올린다. 즐거운 것은 부정을 통한 유희로, 진지한 것은 사회적 구속을 전제한 도덕으로 포장되기가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니체의 ‘철학’에서 진지하고도 도덕적인 것을 생각하게 된다. 장난치는 니체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문자적 사유가 아니라 정신을 마취하는 음악의 세계를 토대로 철학을 이해한 니체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강남 스타일을 말한 싸이처럼 한 민족의(국가의) 스타일을 강력히 요구한 니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제’가 너무 많아 그것을 다 배우다가는 자기 일은 아무것도 못하게 되므로 과감히 역사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니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야구선수나 축구선수, 대기업 사외이사의 연봉, 국회의원의 숫자, 교수의 성과급적 연봉, 모든 것이 숫자로 이루어지는 시대에 과감히 “숫자와 통계학이여 지옥으로 꺼져라!” 하고 독설을 퍼부으며 말의 신비와 말의 마법을 주장한 니체가 어떤가? 당신의 마음을 흔드는가? 이 모든 것이 남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차라투스트라가 되고 예수가 되어 자신에게 가혹한 채찍을 가한 니체! 자기 훈련과 금욕, 자기-극복과 사육을 통해 오로지 사람의 경지를 넘어서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보았던 니체에게서 어떤 영감을 얻을 수 있는가? 철학의 들판을 넘고 문헌학과 문학의 강을 넘어 예술적 도취라는 알프스를 넘어 삶의 깊숙한 골짝에까지 이르는 니체의 철학을 과연 우리가 ‘철학’이라는 울타리에 가두어 둘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으로 가장 적절한 것이 바로 그의 문체, 즉 스타일이다. 스타일은 우리말로 간단하게 번역하기가 힘들다. 예술사에서는 양식이라 번역하고 문학에서는 문체라고, 그리고 일반적으로 댄디 스타일, 프로이센 스타일처럼 그냥 스타일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참고로 에리히 아우어바흐를 번역한 김우창/유종호 이 분들은 문체도 그냥 스타일이라고 번역하였다.) 글을 올리면서 이런 고민을 하는 이유는 니체의 철학 자체가 그의 스타일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 즉 그의 스타일은 용어의 번역만큼이나 일정하지가 않다. 그의 스타일에는 바그너 스타일, 쇼펜하우어 스타일, 프로이센 스타일, 독일 스타일, 차라투스트라 스타일, 스파르타 스타일, 짐승 스타일(뱀과 독수리), 위험천만 스타일, 비극 스타일, 망각 스타일, 연설 스타일, 유아독존 스타일들이 모두 용해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아우르는 철학 사조가 있는가? 없다. 헤겔의 철학이나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느 정도 말할 수 있다. 변증법과 절대정신의 철학이라든가 의지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니체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이것이 아마도 해체주의의 원조로 꼽히는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니체>, 뭉크 作, 1906

그렇기 때문에 그의 철학을 한 냄비 속에 넣어 끓이는 것은 온당한 일이 못 된다. 우선 그의 글이 한 문장 내에서도 변해나가기 때문에 각각의 맥락에 놓여 있는 그의 생각을 하나의 생각으로 모으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령 바그너에 대해서 살펴보면 니체는 처음에 바그너에게 열광했다. 그런데 왜 그가 <바그너의 경우>에서 썼듯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는가는 한 맥락, 하나의 담론에서는 다루기가 힘들다. 그리고 그가 하는 은유적 말을 실제적인 말로 착각을 하는 경우다. 우선 니체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을 하는 철학자다(니체전집 15권, 330쪽)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지” 하는 글은 제목만 보면 ‘수캐 X자랑’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이유가 없지는 않다. 니체는 “나는 결코 문젯거리가 아닌 것에 대해 숙고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오늘날 창의력에 대한 관심이 많은데 니체야말로 창의력의 완결판이다. 이유 없지 않게 그는 모든 가치에 대해 전복적으로 생각했으니 말이다. 철학자는 한 시대와 문화에 속하면서 그것을 비판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해 말을 할 때 그것이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가 말한 “모든 가치의 전복”은 그야말로 지금까지의 모든 진리와 거짓을 흔들어보는 것이었다. 물론 진리와 거짓을 흔들어본 이가 독일에서 니체가 처음은 아니었다. 마르틴 루터가 그랬고, 칼 마르크스가 그랬다. 그러나 이들은 이념으로 흔들었지, 니체처럼 삶 자체를 사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니체는 말한다. “행동하는 자는 양심이 없는데 동시에 그는 아는 것도 없다. 그는 하나를 행하기 위해 대부분의 것을 망각하며, 자신의 배후에 있는 것에 대해 불의를 행한다.”(니체전집 2권, 296쪽) 그러니까 “역사의 과잉은 살아 있는 것에 해를 끼친다”(같은 책, 301쪽).

니체는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것을 철학화했는데 그러자면 그의 언어도 살아 있는 것이어야 했다. 다시 말하지만 사진을 찍든, 철학을 하든 피사체와 대상이 정지해야 마음대로 해석하기가 좋다. 생각해보자. 서 있는 짐승에 활을 쏘는 것이 쉬운가, 아니면 움직이는 짐승에 활을 쏘는 것이 쉬운가?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말을 타고 움직이면서 쏘는 것과 서서 쏘는 것 어느 것이 쉬운가? 하물며 니체는 자기도 움직이면서 움직이는 짐승에 화살을 쏘듯이 자기 사상을 말했기 때문에 여기에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했다. 먼저 그는 이런 상태를 만들기 위해 음악을 공부했고 음악에 몸을 적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노래하는 자의 의식을 가득 채우는 것은 의지의 주체, 즉 자신의 의욕이다”(니체전집 2권, 54쪽) 논리적 도식주의를 보여주는 아폴론적 경향을 싫어하고 그 대신 자연주의적 격정인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그는 사상에 끌어들인다(2권 111쪽). 그러기에 그는 글 가운데서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하”며 “용감하고, 의연하고, 냉소적이며 난폭하기를 요구하는” 지혜를 찾는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 니체의 말대로 우리는 “한 방울 이슬이 떨어졌다 하여 파르르 떨고 있는 저 장미 꽃봉오리와 어떤 점에서 같은가?”를 자문해보아야 한다.

《니체의 문체》 저자 하인츠 슐라퍼와 역자 변학수

이런 니체의 스타일들을 느끼고 수긍하고 체득하기 위해서는 그처럼 예술가(시인, 음악가)가 되어야 하고, 문헌학자로서 고대 그리스를 사랑해야 하고 눈을 똑바로 뜨고 현실을 관찰하고 자기를 극복하고 알프스의 험난한 고산준령을 넘어야 한다. 논리적 도식주의로는 니체의 코끼리 뒷다리만 만질 뿐이다. 니체가 취하는 시점視點은 차라투스트라의 행위, 그리고 우뚝 솟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저자 슐라퍼는 20세기 독일 산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큰 문체론자로서의 니체를 조명한다. 현대 철학이 사상가로서의 니체에 대해 언급할 일은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고, 니체가 나치 이념의 제공자라는 관점도 이제는 시들해졌으며, 이성의 파괴자로서의 니체도 이미 다루어질 만큼 다루어졌다. 슐라퍼가 니체에게 접근하는 방식은 바로 그의 스타일이다. 《니체의 문체》는 스타일로 니체를 읽으라고 유혹한다. 니체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제3의 귀를 가진 사람에게 독일어로 씌어진 책들을 읽는 것은 얼마나 큰 고문인가!” 그렇다. 철학으로 그의 글을 읽는 것도 하나의 고문일 것이다. 그러나 더 큰 고문은 아무런 생각 없이 수사학적 철학을 하고 밋밋한 미문으로 시를 쓰고 소설을 읽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는 점이다. 철학이든 예술이든 위험한 것만이 우리를 흔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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